이향숙 시인님 글방 48

사라진 집 / 이향숙

사라진 집 - 이 향 숙 - 담쟁이가 대문을 읽어내는 골목길 돌아 나오면 페인트 칠 비듬처럼 일어나는 쭈빗 거리는 담장으로 누군가 기다리고 누군가 서성거리다 돌아간 골목이었네 밤마다 모셔온 달빛으로 나무 그림자 어릉대는 벽화를 그려 넣고 담 바깥의 습기와 그 안쪽의 온기로 곰팡이 같이 만만치 않은 세월을 밀어 내보려 안간힘을 써 보는 집이었다네 달팽이관의 난청이 시든 꽃처럼 매달려 있는 낡은 신발장 먼지를 빼곡히 뒤집어 쓴 채 천년을 자도 눈꺼풀에 잠이 매달리던 그 방 수런수런 담 밖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들리던 집속의 방 그 집이 쓰다듬고 품었다네, 핥으며 키웠다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네 날이 갈수록 약하고 노쇠해졌네 동네의 여섯 집 중 제일 끝까지 버뎥다네 터 잡고 산지 반세기만에 소방도로가 났다네 바..

목단애가 / 이향숙

목단애가 / 이향숙 네가 떠났다 붉고 탐스런 입술이 뭉툭하여 야윈 눈 맞춤하던 네가 스러졌다 맺혔다 벌어지며 툭툭 지는 꽃 흔적도 없이 애달프다 꽃 진자리에 왕관을 얹고 속으로만 단단해지는 꽃 부질없는 밖을 떨어내자 꽃잎 밀어내려 버팅기고 매달리던 굳은 심지 같은 시간 견뎌내자고 넘어서 보자고 입술을 깨물 때마다 엉겨 붙던 핏빛 십자가 견고한 안개 속에 검붉음의 시계가 멈춰버린 너무 이른 봄날 그토록 열망했던 꽃 진 자리로

벌에 쏘이다 / 이향숙

벌에 쏘이다 - 이 향 숙 - 나나니벌에 머리를 쏘였다 어쩌자고 겁도 없이 묵혀 둔 소나무 안으로 머리부터 쑥 들이 밀었더니 늙은 호박통 같은 큰 벌잡이 UFO처럼 매달려 있다 놀란 벌 한 마리가 머리 쪽을 돌진하더니 미로 같은 내 머리카락에 얽혔다 벌은 살자고 윙윙대고 나도 살려달라고 펄쩍펄쩍 뛰고 둘이 똑 같다 들이 밀 때와 나갈 때를 분간 못한다 나나니벌 너너나벌 자모음이 얽힌다

동거이묘 / 이향숙

동거이묘 / 이향숙 왜 우리 집으로 자꾸 들어 와? 길 고양이잖아 왜 집고양이처럼 구는 건데 네 집은 풀숲이나 낮은 언덕 아래 비를 피할 비밀스런 요새나 구덩이잖아 대문 아래 뚫린 곳이 생태통로가 되더니 시시때때로 들락날락 하더니 이젠 터 잡고 웅크리고 집 지킴이까지 하는 시키지도 않은 대문 밖 경계를 뚫어져라 살피는 이상하고 검은 길고양이 아무리 쫓아내도 어느 새 들어오고 집을 비우면 시계처럼 나타나 어슬렁거리는 제 집처럼 착각하는 너 처음엔 내가 먼저 착각했지 철제 대문안 버려진 검정 비닐봉지로 발자국 소리도 안나고 재빠르고 날쌔게 검고 질긴데다 가볍기까지 쉭 뒤쫓으면 뒤뜰을 돌아 흔적 없이 사라져 낮은 담장 꽃들 아래 손 한 웅큼도 안 되는 잔구멍으로 걸리거나 긁히지도 않고 놀이터 바람처럼 유유히 ..

어떤 블루 / 이향숙

어떤 블루 / 이향숙 바다의 시계를 아시나요? 푸른 지중해 레즈보스 앞바다 거대한 난민들의 묘지가 되어 간다죠 이미 경험한 전쟁 기근 고문은 치사량을 넘어가요 몰타의 발레타 항구 거기 둥둥 떠 있는 아름다운 구름 속엔 무수한 슬픈 영혼들이 깃들이죠 어떻게 가족과 이별했는지 왜 여기까지 떠나 왔는지 화상으로 얼룩진 케냐 소녀, 그 눈빛에 담는 블루 고통 속에서도 왜 아름다운지, 그 빛 블루 우린 단지 태양을 따라 가요 같은 생의 항해 중에 있어요 끝닿을 곳은 아무도 몰라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치명적인 배를 나눠 타고 있어요 단지 생존을 위해서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이 혼동과 지옥의 고무보트 다닥다닥 온갖 오물로 구겨져 있어요 막 젖 뗀 아이가 겁에 질린 검푸른 바다 위에서 악을 쓰고 울어요 임산부가 ..

무늬의 온도 / 이향숙

무늬의 온도 - 이 향 숙 - 희디 흰 꽃대를 밀어 올릴 때 몰랐다 그리운 전언처럼 날개를 매달 때 더욱 몰랐다 어차피 이생을 목련으로 다 필 수 없으니 여러 날 꿈에 닿지 못해 안으로 깊어지다 짙어진 무늬를 몸져누운 후에야 본다 누워야 환히 보이는 붉어지는 눈빛으로 단번에 후드득 덜어지는 검은 잎 희미해져 가는 시절은 꿈 꾼 것이 아닌데 땅거미처럼 자꾸 뒤척이며 돌아눕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늘이 길어질수록 왜 그토록 잠깐이었는지 다 알 듯하다 당신들의 시절

녹색지대 / 이향숙

녹색지대 - 이 향 숙 - 말차라떼에 녹색 말차 마카롱 어떤가요 나무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새들처럼 이파리를 떨고 있는 날이면 더 좋아요 마음에 눅눅했던 습기를 말려요 소슬바람 한 겹 그네를 밀어 주는 6월쯤이면 근사하지요 어린 찻잎을 따서 밀짚모자 쓰고 맨발로 걸어 가 봐요 *어쿠스틱 콜라보의 고백해요가 둥둥 낮은 구름으로 떠다니네요 슬픈 가사 웅웅거리는 음률도 오늘은 사랑이라 불러 보고 싶은 가요 오늘만은 말차 마카롱 같은 달달한 그대라고 고백해 봐요 꼬리를 감추던 흰색 바탕에 밤색 얼룩무늬를 가진 수줍고 수상한 길 고양이처럼 울타리 가장 낮은 곳으로 오세요 당신의 안전지대 녹색통로로 살며시 빠져나가 스며들고 싶은 날이군요 말차라떼에 녹색 말차 마카롱 어떤가요 아주 얇아지고 폭신하게 가벼워질 때까지..

병산서원, 겹치마 / 이향숙

병산서원, 겹치마 - 이 향 숙 - 희고 먼 백사장에서 물수제비뜨는 일 두 번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푸른 절벽 단풍들이 기우뚱하니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데 강빛은 비껴 앉아 맞절을 받는다 만대루 기둥 마룻장 받치느라 제 몸뚱이 그대로 걸어 나와 주춧돌 위에 눈만 가리고 있다 부끄러운지 고요한데 덩그러니 매달린 북소리, 나른한 낮잠을 깨운다 복례문에 드나들 때 낮추지 못한다 키는 넘쳐나고 마음은 모자란다 배롱나무 꽃들이 뜰 한켠에서 붉다 못해 지쳐 가는 데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아슬한 마음 언저리 생목 올라오듯 하다 어느 누가 이리도 마음 한켠을 잡아당기는지 맞배지붕 겹처마에 아, 저 환장할 가을 빛 빛만 한창 들썩인다

화마 꽃 쿠테타 / 이향숙

화마 꽃 쿠테타 - 이 향 숙 - 소나무를 먼저 태운 불똥들이 휩쓸고 날아와 산을 집을 별장을 공장을 창고를 추사를 개와 닭을 자동차와 길을 곤충과 해충까지도 안녕, 하며 사람들의 집에 질린 눈동자를 날름, 하며 먹고 또 먹어도 허기져요, 하며 아낌없이 태웠다면 어떨까요 *조커의 치켜세워진 빨간 입처럼 그때 허공을 짚던 붉은 음표 고음과 저음의 파장을 곡선으로 나부끼던 길고 긴 불의 혀 밤새도록 노래를 그치지 않았죠 1시간에 5킬로 초속 35미터 도깨비불로 히히거리며 날아 다녔다죠 하늘 한켠이 시뻘겋게 환한 게 수십 킬로 떨어진 집 창문에서도 활활 보였어요 어둑해 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붉은 번짐 궁 궁 재난문자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마비된 도로는 돌처럼 굳어 차를 세워 두고 빠져 나온 사람들이 놀란 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