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48

남정바리 / 이향숙

남정바리 - 이 향 숙 - 팔에 꽃무늬 문신을 새긴 남자가 천천히 해변으로 걸어온다 빛나는 털을 지닌 검은 개 한 마리가 모랫벌로 질주한다 짧은 꼬리를 깃발처럼 흔들다 순간 멈춰서 개는 뒤돌아보고 문신과 마주 친다 둘은 다정한 사이가 되어 모랫벌에 마주 앉는다 명랑한 새털구름이 후경이 되어 완벽히 높게 떠 있다 축항으로 걷다가 만나는 모르는 남자들은 아버지다 늙은 남자, 젊은 남자, 거기에 아버지가 있다 7살의 아버지 9살의 아버지 11살의 아버지 살림망에서 그들이 쏟아져 나오던 남정바리 평평하고 견고한 등은 마당 수돗가 한켠에서 혼자 놀았다 비늘은 긁고 내장을 뺐다 고무다라에 속을 들킨 물것들이 비리고 축축했다 엄마는 누워서 주말 과부가 되었다 어구, 지긋지긋한 저놈의 낚시 소쿠리에 얹혀서 날 좋은 햇..

다정이 병 / 이향숙

다정이 병 - 이 향 숙 - 당신이어서 함께 올 수 있었다고 당신이기에 같이 떠날 수 있었다고 당신이어서 다정이 병인 걸 알아 버렸다고 그렇게 말 했었나요 조금 늦은 문장으로 겹겹의 꽃 사이로 손 흔들고 있는 그대 꽃 핀 자리로 봄이 오듯 봄마다 허리 병이 도진 당신 바람이 흔드는데 노란 연두빛 파도가 마구 일렁이는데 거기 당신이 함께여서 눈부셨다고 그렇게 또 말 했나요 허공을 가르는 연한 하늘과 푸른 바다와 노란 꽃밭의 수평을 그대는 수직으로 나붓하게 펄럭 입니다 아직은 어깨를 밀어주는 바람 한웅 큼이 윙크를 보내고 있네요 그것, 참 유채꽃밭에 당신이 피었습니다 낡은 서랍을 열어 볕을 쏘인 달빛 외투를 입고 오늘 꽃처럼 피었습니다

점포가 산다 / 이향숙

점포가 산다 - 이 향 숙 - 오일 장에 가서 보았다 점포는 길을 향해 나 있다 문도 그렇다 길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 안에 든 주인은 꽃이다 백일홍나무들이 발 하나씩 파묻고 꽃을 피우듯 제 색깔 꽃 하나씩 피워 보고 싶은 거다 붉거나 푸른 검거나 노란 색들의 집, 층층 그러다 시들해 질 땐 점포가 꽃이 된다 문은 열어 두고 주인은 인기척도 없이 멀미나는 바람만 햇빛으로 들락거린다 점포 주인도 다들 외로운 거다 갑갑한 집을 슬쩍 버리고 와선 길욮에 붙어서 무엇을 파는 척 한다 한 생의 잠깐, 지는 줄도 모른체 꽃피는 척 하며 버텨 가는 것이다 날마다 길에 오가는 비슷비슷한 꽃들의 그늘을 제 얼굴 반쪽에 가만히 포개보거나 짚어보는 것이다

벚나무 그늘 아래 / 이향숙

벚나무 그늘 아래 - 이 향 숙 - 그늘에 누우면 세상 귀들이 닫힌다 눈조차 감을 수 없도록 푸른 이파리로 받들고 있는 손가락 그대에게 쉼을 내어 줄 어깨가 그리웠던 시절 지나간 시간들 돌이키지 말라고 노랑지빠귀 새 한 마리 푸르륵 날아간다 꽃 피던 분홍시절은 잊자하고 처연한 버찌 같은 기억 자줏빛 눈매마다 그렁거려 차마 말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잊었다 꽃 진 그늘 아래 묻기로 했다

방포 항 / 이향숙

방포 항 / 이향숙 노을이 기막히다는 소문 꽃다리 횟집에서 한 접시 회, 썰물 같은 배경 노을은 일찌감치 무대에서 사라지고 멋쩍은 주인장 손님 끊긴 창밖 바라보며 조개구이 몇 점 더 얹어준다 자꾸만 감기는 시간 목이 감기고 머릿속이 감기고 눈이 감긴다 매듭이 어디 였나 이리저리 감기고 헝크러진 스토리 퉁 울림을 내며 끊어지는 생채기 방포 항이 어둠속으로 푹 발을 담글 때 까지 자꾸만 허우적거리는 두 발 꽃 다리 위에서 너울너울 헛걸음을 딛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애써 딛는다

거기, 바로 출구 / 이향숙

거기, 바로 출구 - 이 향 숙 - 검은 벨벳 드레스, 유려한 더듬이 해질 녘 남방제비나비 창 안으로 문득 들다 겹눈을 다친 게 확실해 열린 창으로 들어 왔을 테지 네겐 입구가 되는 그곳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들어 와 출구를 찿지 못하는 오후, 산나리 꽃은 저물고 아카시아 달디 단 꿀도 아니어서 파닥거리는 날개 짓 서늘한 미각아래 바동거리는 검은 뒷다리 더듬이로 매달릴 수 없고 중력으로 뚫고 나갈 수도 없는데 툭1 바로 밑에 열린 창 출구이자 입구였던 바로 거기 봉긋한 바람이 네 어깨를 밀어 주던 누리장나무 숲을 지나 탱자나무 잎으로 떠돌던 바람의 돌기로 곤두섰던 그 곳 거기 바로 아래 출구, 열린 창으로 사르륵 날아가 줄래? 입구로 들어와 출구를 더듬는 생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 줄래?

놓아 줘 / 이향숙

놓아 줘 / 이향숙 어디로 가나 따라 걷다 보니 돌아 온 길마다 눈물바다다 숨죽여 혼자 울던 시절이 있었다 담벼락에 울렁이는 나무 그림자들이 밤새도록 흔들릴 때 숨이 탁 멎었다 그렇게 요동칠 때마다 떠나가고 다가오는 너 파란 눈금 같은 새 한 마리로 지워진 손금위에 부리를 쫒는다 어디로 가던 이젠 따라오지 마라 눈물의 한 생을 깊숙이 뭄을 테니 그만 놓아 줘

돌의 꽃 / 이향숙

돌의 꽃 - 이 향 숙 - 언뜻언뜻 내비치는 강어귀의 물무늬 닮지도 바래지도 않는 마음 한켠의 모서리마다 붉은 피 뚝뚝 흘리며 돌의 꽃처럼 피고 지며 비껴가는 시간들 깨어지고 어긋나는 정점에 기어히 손끝을 대어보면 뜨겁다 뜨거운 것 데이지 않기 위해 날카롭고 비겁한 모서리 같은 것 그 모서리 하나가 늑골 뼈 사이에서 사각거리는 소리, 제 자리를 찿지 못해 삐걱거리며 내는 신열위로 깊은 꿈들의 단층 마디마디 무섬증을 일으키며 돋아나는 잎사귀들 짙고 푸르며 툭 떨어지는 화석의 빗장뼈 다시 둥글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 모서리에 베이던 기억을 잊지 못함이다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대는 궤도를 맞추기 위해 어긋나다 베어지며 모서리의 정점에 와 닿았는지 갈라지고 해체되며 거기 빛나는 그 푸른 별이 어떠했냐고 되묻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