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이묘 / 이향숙
왜 우리 집으로 자꾸 들어 와?
길 고양이잖아
왜 집고양이처럼 구는 건데
네 집은 풀숲이나 낮은 언덕 아래 비를 피할
비밀스런 요새나 구덩이잖아
대문 아래 뚫린 곳이 생태통로가 되더니
시시때때로 들락날락 하더니
이젠 터 잡고 웅크리고 집 지킴이까지 하는
시키지도 않은 대문 밖 경계를 뚫어져라 살피는
이상하고 검은 길고양이
아무리 쫓아내도 어느 새 들어오고
집을 비우면 시계처럼 나타나 어슬렁거리는
제 집처럼 착각하는 너
처음엔 내가 먼저 착각했지
철제 대문안 버려진 검정 비닐봉지로
발자국 소리도 안나고
재빠르고 날쌔게
검고 질긴데다 가볍기까지
쉭 뒤쫓으면 뒤뜰을 돌아 흔적 없이 사라져
낮은 담장 꽃들 아래
손 한 웅큼도 안 되는 잔구멍으로
걸리거나 긁히지도 않고
놀이터 바람처럼 유유히 드나드는 너는
내가 땅 집을 잠시 빌려 쓰는 건지
네가 마당을 온통 빌려 쓰는 건지
뒤 뜰에 꽃을, 나무를 녹색 야영 텐트와 나침판 렌턴을
휴대용 의자를 심심한 모종삽을 귀퉁이가 찌그러진
꽃무늬 물 조리개까지 슬쩍 넘보는 건 아니지
누가 사람인지 고양이인지
아무튼 예전에 내가 함부로 쓰다 버린
검은 비닐 봉지가 변신한 건 아니지
동상이몽 아니지?
동거이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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