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48

그림자 벽화 / 이향숙

그림자 벽화 - 이 향 숙 - 담벼락 나무 그림자 사이로 삽이 꽂힌 풍경 돌처럼 굳어서 내가 네게로, 네가 내게로 도무지 올 수 없던 날들 보랏빛 매 발톱이 무서리로 고갤 꺾고 하염없이 흔들려 그대가 만들어준 꽃밭을 가린다 너무 웃자라 무심히 지나쳐도 작고 여린 꽃잎이 수줍게 눈 맞추는 것을 그대는 알지 못 한다 저녁이 더 천천히 온다 이른 봄 늦은 오후 뜰 안 담장에 그림자 벽화 한 점이 숨을 멈출 때 - 사진촬영지 : 수원 지동 벽화마을 -

4시 봄볕 / 이향숙

4시 봄볕 - 이 향 숙 - 주목은 웃자라서 제멋대로구요 오른쪽으로 쏠린 살구나무는 서툰 분홍 입술 빼물고 있어요 서로 다듬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 무관심했던 것 뿐이죠 자주 들뜬 마음이 구름처럼 솟았다가 한 순간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 빠지듯 하던 날들이었나 봐요 손길 못 받고도 자라줘서 눈길 안 준 거리만큼 잘 버텨줘서 그저 고맙다는 말을 눈치로만 읽어내죠 당신의 속눈썹은 너무 짧아서 해독이 어려워요 채 꽃 피우지 못한 목단이 제 붉음을 뱉어 내기 직전 둥근 치마를 말아 머리 꼭대기까지 둘러쓰고 있어요 곧 꽃 틔울 일만 남았는데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이즈음의 빛들은 서쪽으로 어스름 쏠린 은비녀를 꽂고 낭창낭창 버선발로 들어오는데 비스듬하고 촉촉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너무 좋아요 벗어 둔 ..

자무나 강에게 / 이향숙

자무나 강에게 - 이 향 숙 - 다른 건 염두에 두지 않을게 데칸고원 야외 천막에서 태어난 14번째 아이는 열병의 꽃으로 다시 돋아나도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22년을 공들여 줄게 더 지극히 그 나머지 시간은 오롯이 자무나 강을 바라볼게 오래도록 붉게 물든 노을이 사라지는 날들 날마다 지켜볼게 천 마리의 코키리를 모셔다 가여운 순백의 손가락에 희디 흰 대리석을 깔아 줄게 청금석 수정 터키석 마노 산호 그들만의 빛을 거둬서 꽃무늬를 새겨줄게 우리만이 아는 비밀한 문양으로 희디 흰 눈물의 신화를 새길게 평생 갇힐게 아그라 성에 갇혀 너만을 바라볼게 일생의 낙으로 알게 그렇게 살게 경전에 새긴 꽃에 되풀이 할게 뭄타즈 마할, 마할 마할 그대 이름으로 입 밖을 떠도는 노래가 될게 남은 생을 유배되어 줄게 전하..

왜가리 이명 / 이향숙

왜가리 이명 - 이 향 숙 - 숲 근처를 지나다 왜가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허공을 때리고 가는 바람의 웃음소리 두어 명이 쳇쳇 귀엣말로 하기 전 말을 아낄 때 그 때처럼 강물에 발 담근 산들이 먼저 젖고 새들의 빈 둥지가 젖고 봄비들이 다투어 제 몸을 던져도 습지엔 자꾸 물이 줄어들었다 새는 외로 와서 허공에 대고 눈을 부릅떴을 게다 개구리가 들쥐가 뱀이 곤충이 사라져서 슬펐을 것이다 꼬맹이 그 시절 껌 딱지처럼 짝 붙어 다니던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나 왜가리같이 길고 흰 목을 한 다시 비를 긋고 가는 공명, 쳇쳇쳇 옆으로 부풀어 오르는 귓속에 헛바람이 들어가고 꽃이 드나들고 개구리가 들쥐가 뱀이 곤충이 집을 짓는다 두드리는 빗소리 차츰, 소란 숲 근처를 지나다 주문을 외운다 헌 귀 받고 새 귀 다..

새들의 전서

새들의 전서 검은 모래 위 발자국 수만 개가 엉겨 붙은 거룩한 꽃무늬 어지러운 문자를 따라 곰곰히 들여다보니 난독증이다 얼마를 서성거렸을 조형문자 너도 어찌할 바를 몰라 묵묵히 서서 고개를 파묻고 버텼던 시간 바람이 이는 방향으로 시린 결들이 금 긋고 간 자리 품고 싶어도 품을 수 없는 그런 바다가 있다 어두워져야 비로소 보이는

이별 방정식 / 이향숙

이별 방정식 - 이 향 숙 - 해가 가느라고 그러는 거야 스산하고 춥고 발목부터 시리잖아 가령 뭉근히 저려오는 것도 꼭 먼 곳부터 뒤꿈치 갈라지듯 골이 패이지 따끔거리고 디딜 때마다 아픈 건 꽤 오래 가야 해 기억할게, 건너편 붉은 건물 뒤 배경처럼 서 있는 키 큰 나무가 안개를 베고 누워있어 희미해 네가 나를 버려 주기를 기대할게 비틀거리던 신발을 가지런히 신겨주던 그 손으로 발목을 잘라 주었다면 붉은 피 엉겨 붙어 꽃이 몇 번이나 피었다 졌을 거야 발목 잘라도 밤마다 자라던 파래 같은 머리카락 꿈마다 잦아들어 묶다가 헝크러진 기억 똑바로 걷지 못해 역류하는 저 발목 더 이상 매달려 버티지 마 붉고 황홀해서 어둡고 쓸쓸해질 일만 남은 저녁 이젠 그만

딱 한 번의 봄날 / 이향숙

딱 한 번의 봄날 - 이 향 숙 - 봄날이 열 번 남았다면 봄날이 스무 번 돌아온다면 봄날이 서른 번 기다린다면 꼭 한 번 남은 것 같은 봄인 듯 여기고 남녘 볕 잘 드는 구릉에 다다라 멀찌감치 흐드러진 봄꽃들 바라 볼 것이다 꼭 두 번만 돌아올 봄이라면 익은 곡주에 꽃잎 동동 띄워서 잊으려야 잊히는 않는 이름들 가만히 불러 볼 것이다 꼭 세 번만 기다려 주는 봄이라면 강물 풀리는 소리, 아련히 강둑에 누워 하늘 일렁일 때 마다 쏟아지는 꽃비를 온 몸으로 받을 것이다 그런 딱 한 번의 봄날이 내게도 올 것이다

눈꽃 / 이향숙

눈꽃 / 이향숙 바다가 엎드린 허리를 따라 논밭들을 뱉어 내고 더 낮게 웅크리는 전선아래 길을 잃어버려 너울거리는 눈들의 춤 들판이 사라지고 가난한 동네의 지붕들이 파묻히고 낮달같이 천진한 아이들 목소리도 끊겨 길을 잃다 날은 저물고 더욱 거센 눈발 놓아지는 정신을 애써 추스려 지상에 사라진 길들을 되짚으며 빠져 나왔던 그 첫 발령지의 폭설 감감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발갛게 부어오른 찬 손을 말없이 붙잡고 글썽이던 아버지의 눈물 폭설에 담긴 기억 하나가 눈꽃으로 피어 아롱아롱 가슴 한켠에 따듯하게 얼어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