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48

여의다와 여위다 / 이향숙

여의다와 여위다 - 이 향 숙 - 샤스타데이지가 뒤란에 가득 피어나 속절없는 바람에 하얀 별처럼 마구 흔들리는데 두 장의 목숨을 한 겹으로 떠나보낸 심정은 하룻밤 꽃 진 자리처럼 덧없다고 미안하다 따뜻한 온돌방처럼 데워주지 못해서 꼭 안아 주지 못해서 채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 웅크리고 있는 방 그 방에 들어 가 볼 용기가 없어서 아픈 데를 혼자 핥게 내버려 두는 것 진작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 해보는 것 감감해진 들로 나가 흙을 파내고 또 뒤집고 굵은 비를 채칙처럼 받아내고 또 받아내며 유령처럼 서 있다 아프구나 쓰다듬어 주지 못해서 다독이며 읽어주지 못해서 배수로가 없는 빈 밭고랑에 빗물처럼 스며들어 누수처럼 번지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엉겨 붙는 진흙처럼 가슴속에 하나씩 묻고 사는 눈물 가득한 그..

소울 하우스 / 이향숙

소울 하우스 - 이 향 숙 - 터를 잡고 집을 짓자는 산 속이 망설여지는 건 달별이 창으로 놀러 오지 않는 밤이면 적막할 것 같아 낮은 담을 따라 나무 그림자들이 머리를 풀고 춤을 추겠지만 재즈같이 나뭇잎을 흔들어 주겠지만 그걸 오래도록 보고 또 보고 있겠지만 어쩐다지 밤새 잠 못 들며 뒤척였는데 새벽같이 또 무얼 심겠다며 눈뜨면 없어져, 당신이 도 곁에서 사라져 확실한 분리불안증이지 마을 굴다리를 따라 바다로 난 길 뿌연 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 소리 내지도 않고 요란하지도 않게 수직의 눈물방울을 매달고 뿌리를 내리지 못해 부표처럼 떠다니는 건 아니지 집을 찿아 헤매는 우리 영혼의 집을 찿는 건 아니지 손바닥을 펴면 빠져 나가는 모래처럼 천진하게 웃던 때가 언제였나 몰라 이젠 괜찮아 주문을 외워 보지만 ..

부추꽃 / 이향숙

부추꽃 / 이향숙 빛이 사라지면 환히 볼 수 있는 달빛을 모셔온 목화송이처럼 홀로 환한 꽃 손 시린 찬별을 꾹꾹 눌러 와서 송이마다 따뜻이 꽂아 둔 꽃 그늘 깊은 뒤뜰에서 버텨 주며 긴 밤 홀로 견디는 괜찮다 고맙다 애써 참아내는 꽃 올 겨울은 제발 아프면 안 돼, 정신 똑똑히 차려야 돼 그래 그러마, 너 안 힘들게 할게 냉정하게 말해도 서운 하다 안하고 흔들리지 않는 척 꼿꼿이 버텨 주는 꽃 잠 안오는 한밤중에 문득 내다 본 엄마같은 꽃, 생각하면 자꾸 눈물 나는 꽃

손톱을 자르다 / 이향숙

손톱을 자르다 - 이 향 숙 - 손톱의 중간을 베었다 머리를 묶을 때 머리카락이 끼고 니트 옷을 입을 때마다 실오라기를 당긴다 보풀처럼 거추장스러운 손톱 그렇다고 통째로 뺄 수는 없다 기다리는 것이다 묵묵히 시간이 지나면 손톱이 자라고 베어진 상처는 점점 위로 밀려 올라와 손톱 끝의 살 언덕과 같은 높이로 자랄 때 그 때 비로소 반듯하게 자르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손톱 끝의 남은 흉터, 굴곡의 무늬를 보며 잊어 보는 것이다 늘 마음에 부대끼고 거추장스러운 아픈 것 떼어 낼 수도 없이 착 달라 붙어 있는 것 때론 모른 척 무심한 척 넘겨 주면 되는 것이다 베어진 손톱을 기다려 주듯 아픈 곳에 새살 돋듯 차츰 잊히는 것을 선물처럼 가져다 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잠잠히

쏠려있다, 바늘꽃 / 이향숙

쏠려있다, 바늘꽃 - 이 향 숙 - 툭하며 줄기 몇 대가 끊어지고 곷대가 맥없이 스러졌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밥풀떼기 같은 꽃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분홍 꽃들이 마냥 위안이었는데 지난 밤 통째로 빠져나온 비바람이 서릿발로 꽂혔다 머리 풀어 헤치고 속으로 울고 있는지 오른편으로 쏠려 휘어진 더미 모양새 잡아 준다고 감아쥐고 왼편으로 모두 돌렸다 며칠 째 받지 않는 전화 오른쪽으로 가 있는 마음을 왼쪽으로 돌리라 했다 손대지 말아야 할 마음결에 잔금이 갔다 꽃 더미도 바람에 마구 쏠려 가는데 도무지 어디로 갈지 몰라 잠시 흔들리는 네 애잔함 미처 읽어 내지 못했다 미안하다 명랑하고 봉긋한 구름송이 같은 여린 그 마음 채 덜 익은 마음 줄기 몇 마디가 끊어지고 부서진 거다 아팠겠다

기사문항 / 이향숙

기사문항 / 이향숙 밀려 나온 들썩임이 가득하다 견뎌내다 한 번 씩 저렇게 속 뒤집어 보는 건 고단한 눈을 잠시 파도에 매어 다는 시간 한 방향을 뚫어져라 보는 갈매기처럼 파도의 무늬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 둥글고 높은 곡선으로 겹겹을 꽃 피울 때 그 때 사뿐히 올라타야지 구름처럼 가볍게, 서핑 어디선가 본 듯한 저 끝없는 파랑은 언제 적 내 얼굴입니까? 마음을 뜯어 낸 생채기는 제발 그만 들여다보기 파도를 탄다 행복을 탄다 다시 한 번 날아오르자, 서핑 말갛고 비릿한 속을 풀어 쓱쓱 비빈다 물회 한 그릇에 잘 견디지 마 지금도 충분해

담쟁이와 고양이 / 이향숙

담쟁이와 고양이 - 이 향 숙 -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라고 하길래 사는 게 왜 다 그래야 해 하고 되묻다가 나는 담쟁이처럼 기를 쓰고 벽을 넘느라 마침내 붉어지고 나는 철 못 드는 고양이처럼 꼬리를 둥글게 말고 낭창하게 본다 꼭 앞으로만 가야 길이 아니야 옆도 보고 뒤도 봐야 피는 꽃 지는 꽃 시든 꽃 아픈 꽃 다 보이지 꽃피다 지고 잎 피다 다시 진 마디로 그늘이 자꾸 길어지는 만큼 나를 빌리고 너를 깊숙이 빌려 쓴 것 철지난 마른 빈 가지에 다시 눈송이 소복 쌓여 하얀 꽃 뭉글 피어나면 사는 건 이런 거구나 그 때야 말 할런지도 퍼붓다 스러질 눈이 한 시절 애증처럼 못내 엉겨 붙어 추운 뿌리 갈래갈래 적시며 가난한 몸 서로 내어주며 함께 흘렀다는 걸

등이 굽는 꽃 / 이향숙

등이 굽는 꽃 - 이 향 숙 - 아무리 끙끙대도 너무 멀다 목련나무 무심한 척 봉긋봉긋 부풀어 오르는데 눈 들어 본 하늘 아직 흐리다 목울대 돋듯 휘어진 가지처럼 자꾸만 피고 진다 날이 갈수록 등이 굽는 내 어머니 고향집 뜰에도 곧 목련이 필거라는 소식 꽃샘 내는 추위에 코끝이 자주 시리고 어쩔 수 없는 그리운 것들은 너무 멀리 있다

농담 / 이향숙

농담 / 이향숙 가령 내 손금에 돋은 별을 출발해 네 어깨로 이어진 자줏빛 *물병자리 행성으로 가는 것은 감자를 왜 라면에 넣어야 해 라고 묻는 다는 걸 감자를 왜 냉장고에 넣어야 해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곁을 멈추고 끊임없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귀 울림처럼 그 만큼의 온도로 데워지는 궁금증 숨어 있는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분명해라고 말하려다 삼킨다 검고 푸른 손금이 피어나는 손등 농담이 사라지고 식탁이 조용하고 오랜만에 끓여 준 감자 섞은 라면 먹는다 낯설어서 귀를 울이고 다시 기약 없어서 고장 난지 오래입니다만 수선스럽지 않은 어눌한 입은 다시 닫으시고 할 말은 속으로만 해 주세요 이상, 무슨 그리움 같은 것을 희다고 소리 내는 것 나 좀 궁금해 줄래? 라고 묻고 싶은 것 그만두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