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48

안부 / 이향숙

안부 / 이향숙 누군가 당깁니다 낯선 피가 낯설지 않게 당겨옵니다 밀려가는 게 아니라 당겨 오는 거라고 모래언덕 핥고 간 자리마다 안부를 묻고 싶었다고 전합니다 귓불을 물고 뜯는 파도 소리가 천진합니다 젖은 손부채를 하고 뭉근함으로 애써 먼 데 눈을 맞춰봅니다 자꾸만 짧아 지는 손가락으로 수평을 그어 보는 데 등대 모양을 닮은 부표는 노랑노랑입니다 푸른 혈관을 꽂는 바다에 막 도착 했습니다 온 몸의 피를 솟구쳐 걸러내는 중입니다 온통 푸릅니다 오늘만큼 파도는 알맞은 생 하나를 골라내느라 수없이 흔들리고 일렁입니다 지금 당신이 그리운 시간입니다

간절곶의 바람개비 / 이향숙

간절곶의 바람개비 - 이 향 숙 - 보았을까 절벽 돌무더기 속 아무렇게나 피어 흔들리며 시들어 가는 가여운 보랏빛 엉겅퀴 몇 송이를 보았을까 떠올리기 전 이미 잊었던 것들을 돌아보면 아득할수록 멀어져 가는 것들아 손사래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서하라고 눈물을 매단 채 저만치 달려오는 걸 보았을까 꿈꿀 수 없는 것들을 꿈꾸기 시작한 그때부터였을까 그랬을까 바람이 불었을까 마음의 방향들이 비껴가며 멈출 때 다시 돌아가는 간절곶의 바람개비 그렇게 누구든 흔들렸을까

이상한 드로잉 / 이향숙

이상한 드로잉 - 이 향 숙 - 저는 일생이 뭐든 한 번에 내리 긋는 이상한 선긋기에 빠져 있나 봐요 선 긋는 게 가관입니다 한 번에 진하고 거칠잖아요 성격을 한 번에 다 보이려 하지 말아요 이 튀어 나오는 경계면은 어쩔 거예요? 비장의 카드 한 장 손에 들고 지구별의 문간방 살이를 꾹 견디고 있는 지도 몰라 만만치 않은 여자들이 이 별에 살고 있다 손가락 안에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것 한 번을 지켜내려 무진장 고통 받는 그대여 색다른 당신은 좀 무례한 거 아닙니까? 자꾸만 묻고 싶어지는데 살이 통통해진 고통 볕든 마당에 쪼그려 앉아 손톱을 깎다가 뭉툭해진 손톱을 바라보다가 지난 해 부실하던 감나무에 올핸 웬 뾰죽 감들이 저리 둥글게 촘촘히 달렸는지 모르겠다 해가리 하는 모양이다 혼잣말 한다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데 / 이향숙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데 - 이 향 숙 - 딛었던 발자국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화살처럼 꽂히는 햇살 하나에도 어지럼증이 인다 뛰어내려 안기고 싶은 짙푸른 물무늬 절망은 빛나는 귀엣말처럼 속삭이고 감겨오는데 절벽 끝 바다가 더 간절한 건 너를 닮은 잠언 길 따라 오르며 나올 때 발목이 자주 툭툭 꺾이고 둘러싸인 그들은 자꾸만 뒤뚱거린다 끊어지고 기울어진 십자가는 어느새 높은 탑이 되어 비스듬한 안개가 안간힘을 다해 감싸 쥐고 있다 서서히 부서지고 아무것도 아닌 듯 스러져 갈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을까 ◦까보다로까 - ◦까보다로까 - 유럽 대륙 포루투갈 땅 끝 마을

새를 데려오는 방법 / 이향숙

새를 데려오는 방법 - 이 향 숙 - 새는 데려 오는 게 아니야 저절로 오기도 하고 제 맘대로 날아가기도 하지 어쩌자고 오래 묵은 오디나무 있는 힘 다해 어린 새들 불러 모아 이파리 베고 공들여 젖을 물린다 계절을 건너느라 뾰루대는 노랫소리, 그런 다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금이 가는 하공을 애써 견디느라 안으로 휘는 그늘 꽃 나 없으면 울 줄 알았는데, 빙긋 왜 자꾸 웃음이 나는 거지, 방긋 마당 한쪽에 오디나무 심어 봐 용케도 알고 온단다 젖 먹으러 그런데 문득, 새장이 필요하구나 어디에 쓰려고요? 홀연히 허공을 붙들고 있는 그 날개를 어디에 걸어 놓으려구요? 어쩌다 보랏빛 눈시울이 눈꺼풀에 매달린다 해도 슬퍼하고 낯설지 마 새는 데려 오는 게 아니야

닻 / 이향숙

닻 / 이향숙 녹슬기 시작하는 바다를 오래 바라보다가 내딛던 물살에서 잠시 내리면 다시 돌아온다고 했잖아 큰 파고의 이랑이 거세지면서 풍랑의 심장부에 머물지 않겠다는 약속 포구로 돌아올 때마다 느슨해진 밧줄을 단단히 묶는 것은 이미 의지했기 때문이잖아 어느 비릿한 갯벌의 부드러운 뻘 흙속, 수런거리는 움직임에 네 심장을 묻었나 물 오른 나무들이 머리를 풀어헤치던 그 봄날 강가에서 멈칫 흔들리며 푸른 발목을 적셨나 견고히 묶여져서 자유롭게 하지 말아야 하는 기밀의 문서처럼 서로의 끈이 되어야 했던 때 부풀지 못하는 약속처럼 납작해져서 줄 하나 묶지 못한 네게 천근의 돌을 달고 싶었다 정박할 포구가 점점 가까울수록 집어등의 불빛은 더 멀리 너울대고 휘감은 수초들의 눈빛이 하염없이 붉고 붉더라

곁 / 이향숙

곁 / 이향숙 가까이 자주 내주지 않는 것은 오래도록 그립지 않게 의 같은 말 모랫벌은 바다의 노래를 듣고 바다는 모랫벌을 끌어안으며 때로 얕게 때론 깊숙이 서로를 적셔 갔을 뿐 곁에 있어도 다 알 수 없지, 속마음 그 언제부터 곁을 잃은 우리 보랏빛 갯 메꽃 가득한 모래언덕 맨발로 돌아 나오는 길 너를 밟지 않으려 조심조심 발 디디는 간절한 네 곁 바다가 되고 물이 되어 물이 되고 바다가 되어 부르는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영영 그립지 않게

땅바닥 문신 / 이향숙

땅바닥 문신 - 이 향 숙 - 흐드러진 오디나무 아래 부추 밭을 지나 수박 밭을 지나 루드베키아꽃들에게로 까지 종종거리는 떨어진 오디 몇 알 여린 상추밭에 굴려가며 쪼아대는 며칠 내내 부리가 새파래지는 어린 참새들 분주한 저녁 습기를 머금은 동쪽 바다에서 부는 이즈음 바람 냄새 찌익 모르스 부호 뾰루뾰루 회신하는 나뭇가지에 걸린 새소리 한 번도 온 적 없는 수많은 저녁이 떨어져 짓이겨 보라 보라빛으로 검은 꽃처럼 당바닥 문신을 새겨 넣는

영영, 눈빛

눈빛이 파르스름해 질락말락 손끝에 꽃물이 들락 말락 기억조차 가뭇한 시절이 꿈처럼 깨어나고 해지는 강둑 어디쯤 자주 걸었다 그해 겨울 들녘에는 때 이른 추위가 숫ㄴ처가 없는 반송 된 편지처럼 돌아 다녔다 밀어내도 안으로 좁혀지는 빛은 자주 새어 나갔다 그 빛 안에 그림자를 만들고 여린 꽃무늬를 수없이 찍어 봐도 눈빛에 손발을 켜켜이 매어 달아도 마주치지 못하므로 흐르는 별처럼 비껴가고 떠돌던 시절 어쩌다 머뭇거리다가 소리 내어 읽지 못한 네 안쪽의 온도나 습도 같은 것 영영 질락 말락, 들락 말락

죽서루, 저무는 / 이향숙

죽서루, 저무는 - 이 향 숙 - 둘이 겸상하네요 누군가 싱거운 말 할 때 슬쩍 한 자리 비껴서 마주 앉은 부부처럼 그런 은근한 자리 며칠 동안 미열이 오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릿대 숲에 서걱서걱 잔바람이 일었는데 서쪽 끝에 지은 누각이라고 했다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을 용모였다 소문도 없이 조용한 일몰이 아름답다 죽서루 절벽을 모로 베고 누운 강은 오십 번이나 아래에서 위로 건너야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했다 오십천에 열배를 더하여도 오십천에 백배를 오르내린다 해도 나아갈 수 없는 날 들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 찬 불덩이가 활활 쏟아지는 장작더미 같았다 그때 뜨란 대나무 숲에서 누군가 속울음처럼 젖는 것이다 이명처럼 들어 앉아 있던 오래 된 작은 누각 하나가 퉁 울림소리를 내며 서쪽 어디 끝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