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사라진 집 / 이향숙

덕 산 2021. 9. 24. 13:36

 

 

 

 

 

사라진 집

         - 이 향 숙 -

 

 

담쟁이가 대문을 읽어내는

골목길 돌아 나오면 페인트 칠 비듬처럼 일어나는

쭈빗 거리는 담장으로

누군가 기다리고 누군가 서성거리다 돌아간

골목이었네

 

밤마다 모셔온 달빛으로 나무 그림자 어릉대는

벽화를 그려 넣고 담 바깥의 습기와 그 안쪽의

온기로 곰팡이 같이 만만치 않은 세월을

밀어 내보려 안간힘을 써 보는 집이었다네

달팽이관의 난청이 시든 꽃처럼 매달려 있는

낡은 신발장

먼지를 빼곡히 뒤집어 쓴 채

천년을 자도 눈꺼풀에 잠이 매달리던 그 방

수런수런 담 밖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들리던

집속의 방

 

그 집이 쓰다듬고 품었다네, 핥으며 키웠다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네

날이 갈수록 약하고 노쇠해졌네

동네의 여섯 집 중 제일 끝까지 버뎥다네

터 잡고 산지 반세기만에 소방도로가 났다네

바깥어른 저 세상 간지 12년째 되던 해 라네

 

서서도 앉은뱅이 누워도 패랭이 꽃같이

헐어가고 늙어가던

자주 흔들리는 아슬한 점 하나로

위태롭게 서 있던 그 집

궤도 밖으로 토굴 같은 시간이 멈춘

 

지상에 사라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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