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남정바리 / 이향숙

덕 산 2021. 8. 24. 13:36

 

 

 

 

 

남정바리

         - 이 향 숙 -

 

 

팔에 꽃무늬 문신을 새긴 남자가 천천히 해변으로 걸어온다

빛나는 털을 지닌 검은 개 한 마리가

모랫벌로 질주한다 짧은 꼬리를 깃발처럼 흔들다

순간 멈춰서 개는 뒤돌아보고 문신과 마주 친다

둘은 다정한 사이가 되어 모랫벌에 마주 앉는다

명랑한 새털구름이 후경이 되어 완벽히 높게 떠 있다

 

축항으로 걷다가 만나는 모르는 남자들은 아버지다

늙은 남자, 젊은 남자, 거기에 아버지가 있다

7살의 아버지 9살의 아버지 11살의 아버지

 

살림망에서 그들이 쏟아져 나오던 남정바리

평평하고 견고한 등은 마당 수돗가 한켠에서

혼자 놀았다

 

비늘은 긁고 내장을 뺐다

고무다라에 속을 들킨 물것들이 비리고 축축했다

엄마는 누워서 주말 과부가 되었다

어구, 지긋지긋한 저놈의 낚시

 

소쿠리에 얹혀서 날 좋은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남정바리들

봉지 싸서 동네로 퍼 돌리며 심부름 했다

잔 돌맹이 차며 심심한 꼬댕이 언덕길 오르내리면

에구, 그 놈의 남정바리들

 

꽃무늬 문신을 한 남자가 사라졌다

검정개와 함께 온 데 간 데 없이 증발했다

 

아버지들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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