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일기 / 이해인
비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빨랫줄로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 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어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통통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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