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필름 / 김춘리
호밀들이 필름처럼 흔들린 시간
장화를 벗어 놓고 새가 오길 기다린다
커피를 끓이거나 구운 통밀을 빻을 때
앉거나 서는 것을 냄새로 알아채는 새의 발가락
머리와 이마의 경계가 모호한 새는
장화였구나
나는 불쑥 태어나서 키가 작았다
발꿈치를 들거나 턱을 뒤로 젖히는 에어풍선
그늘을 만들거나태양을 가리는 일은 손목의 일이어서
서 있어도 키 작은 호밀밭은 바빴다
호밀밭 사이로 듬성듬성 포도나무를 심는다
그늘이 필요하거나
어린 포도송이에서 비린내가 날 때
웃자란 호밀은 베지 말고 눕혀줘
구겨져 있는 나를 일으킬 알람이 필요해
반 바퀴를 지나 시소처럼 움직이는 괘종시계
포도껍질을 뱉으면 알람은 풍선이 되어 날아갔다
장화를 반으로 자르고 흰 페인트를 칠한다
저걸 보렴, 방주가 호밀밭 위를 가르며 떠가는구나
호밀은 물속에서 흔들려, 흔들려, 흔들리고
새와 포도나무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나는 키가 커 보이려고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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