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집
- 이 향 숙 -
담쟁이가 대문을 읽어내는
골목길 돌아 나오면 페인트 칠 비듬처럼 일어나는
쭈빗 거리는 담장으로
누군가 기다리고 누군가 서성거리다 돌아간
골목이었네
밤마다 모셔온 달빛으로 나무 그림자 어릉대는
벽화를 그려 넣고 담 바깥의 습기와 그 안쪽의
온기로 곰팡이 같이 만만치 않은 세월을
밀어 내보려 안간힘을 써 보는 집이었다네
달팽이관의 난청이 시든 꽃처럼 매달려 있는
낡은 신발장
먼지를 빼곡히 뒤집어 쓴 채
천년을 자도 눈꺼풀에 잠이 매달리던 그 방
수런수런 담 밖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들리던
집속의 방
그 집이 쓰다듬고 품었다네, 핥으며 키웠다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네
날이 갈수록 약하고 노쇠해졌네
동네의 여섯 집 중 제일 끝까지 버뎥다네
터 잡고 산지 반세기만에 소방도로가 났다네
바깥어른 저 세상 간지 12년째 되던 해 라네
서서도 앉은뱅이 누워도 패랭이 꽃같이
헐어가고 늙어가던
자주 흔들리는 아슬한 점 하나로
위태롭게 서 있던 그 집
궤도 밖으로 토굴 같은 시간이 멈춘
지상에 사라진 집
'이향숙 시인님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이 굽는 꽃 / 이향숙 (0) | 2021.09.26 |
---|---|
농담 / 이향숙 (0) | 2021.09.25 |
시 받기 / 이향숙 (0) | 2021.09.23 |
목단애가 / 이향숙 (0) | 2021.09.16 |
벌에 쏘이다 / 이향숙 (0) | 2021.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