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내 늙으면

덕 산 2012. 6. 17. 19:43

 

 

 

 

 

내 늙어 허옇게 귀밑머리 날릴 때면
부귀공명 뒤로하고 희로애락 접어놓고
깊은 숲속 작은 터에 오두막 한 채 지어
희미한 호롱불에 짚을 꼬아 새끼 엮고
거친 손 바느질하는 아내 함께 살리라

낮이면 밭에 나가 지렁이 벗을 삼고
호미쥐고 쟁기끌어 베적삼 젖어 들면
다람쥐, 고슴도치, 너구리 모두 불러
산까치 곡조 따라 다함께 노래하며
산딸기 머루주에 시름 날려 버리리라

옥수수 익어 가면 콩밭도 매어 내어
참하게 흘린 땀 시냇물에 흘려 내고
새참 나른 정든 아내 손길 한번 마주 잡고
거칠은 산나물찬 외다 않고 즐겨 받아
하루 두 끼 보리밥도 꿀같이 먹으리라

번잡한 세상사를 저 멀리 던져 두고
산비둘기 구구소리 아침 인사 나누고
풀내음 젖어 드는 보드라운 흙을 일궈
기울어진 석양녘에 내 마음 그려 놓고
흘러 가는 구름 속에 맑은 사연 띄우리라

밤 깊고 별빛 젖어 고요함이 밀려 오면
장작 군불 높이 넣어 고구마 구워내고
감자 이랑 매느라 꼬부라진 늙은 아내
어깨도 두드리고 등어리도 긁어 주며
젊어서 못다 나눈 사랑 얘기 들으리라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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