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시인님 글방 549

겨울비 / 淸草배창호

겨울비 / 淸草배창호 삭막한 동토凍土의 황량한 기슭마다 마른 거죽으로 변해버린 산하의 들녘은 휑하도록 스산한데도 벌판을 쓸고 온 바람처럼 황톳빛 먼지가 일어도 낯설지 않아 겨우살이가 혹독하다는 건 새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낙엽 교목만 즐비한 산등성에 잎이 진 마른자리마다 골바람에 바스락대는 가랑잎에 뿔뿔이 맺힌 이슬로 내리 젖 물리듯 품어 안는 겨울비! 허허롭다는 말에 의미를 두지 않았어도 시몬, 의 낙엽 밟는 소리마저 일깨우는 싸락눈 내리듯 스밈으로 와닿는 빗소리! 작은 스침조차 촛불 같은 생기를 불어넣는 겨울비는 사랑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낙엽이 가는 길 / 淸草배창호

낙엽이 가는 길 / 淸草배창호 한 때 넘치도록 풍미했던 네, 춤사위에 동공이 멎었는데 고운 시절 인연의 절색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지막 한 잎조차 그렇게 매달린 체 칼바람 서리 짓에 영혼을 잃었으니 잘난 한때도 속수무책이라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러 날이 저물고 꿈이 길다는 다가온 동토凍土의 자리매김에 텅 빈 허허로움조차 충만이라며 안고 뒹군다 한설寒雪 골바람은 시린 어깻죽지의 거죽까지 옥죄이는 사랑한 만큼 공허한 걸 깨달은 외로움을 차마 삼킬 수 없어 여운을 잠재운 옛사랑만 사그락사그락, 바스락거린다

억새의 독백 / 淸草배창호

억새의 독백 / 淸草배창호 홀씨 하나이고 삭힌 땅거미 내리듯 잎새 달이 엊그제 같았건만, 텅 빈 속 뜰에 마른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리면 어이 하리야! 아름다운 것일수록 머무름이 짧다지만 속울음 터뜨릴 그루터기만 남았는데 바람에 전하는 속엣말이지만, 목적 없는 장단에도 의연하게 잉걸불의 열정인 줄만 알았는데 훌훌 벗어버린 섶 대궁에 잰걸음의 거칠은 들녘에는 하얀 포말이 쉴 새 없이 일렁인다 어찌 이름조차 억새라고 불렀을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도 억척을 그대로 빼닮은 걸작이거늘, 다가올 삼동三冬의 겨우살이도 서걱이는 혼신을 다한 살풀이로 세상사 놓고 간 깊은 상념에 들 테지만

석양夕陽 놀의 사랑 / 淸草배창호

석양夕陽 놀의 사랑 / 淸草배창호 어느 날, 억새의 사그락대는 소리가 고요한 물결처럼 번지는 끝없는 생멸의 쳇바퀴로 오고 가는 해와 달, 무수히 떠도는 별 무리처럼 그윽한 눈길이 와닿는 걸 누가 알겠습니까 아득한 낭에 핀 한 떨기 꽃처럼,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거리는 멀고도 가까운 수평선의 섬과 같아서 먼 발취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빈 배와 같이 오직 가슴으로 이어지는 어스름 빛의 그리움이란걸 저물녘에서야 알았습니다 저녁놀은 기다려 주지 않는 조류처럼 아낌없이 태워 사그라져 버리는 일인데도 그립다 말도 못 하는 은하가 바라는 것은 꺼지지 않는 잉걸불을 지피는 회상의 언덕 같은 무한의 사랑입니다

입동立冬에서 겨울나기 / 淸草배창호

입동立冬에서 겨울나기 / 淸草배창호 그믐밤이 쪽잠에 든 초승달 재촉해도 빙점氷點의 찬 서리에 시든 억새, 메마른 바람 소리만 듣다가 때아닌 눈꽃으로 한소끔, 일어나니 또록또록 허옇다 어둑살 촉촉이 젖어 드는 떠나보낸 질곡에는 젖빛 운해로 덮여 조촐히 바라보는 일조차 회한에 든 슬픈 낮달처럼, 못내 처마 끝 휘영청 걸려있을지라도 겨울비 닮은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져버릴 수 없는 번민의 몹쓸 정을, 벚나무의 한 잎 단풍도 가물가물 희붐한 안개 속에서 사뭇 환상적인데 이별은 만남을 위한 준비라지만 강물이 흘러가듯 날 새면 이내 통정通情하길 바라는 마음인데도 범생의 가난한 겨울나기는 엊그제 텅 빈 충만조차 내려놓았건만 외따로이 눈꺼풀만 하얗도록 무겁다

억새의 독백 / 淸草배창호

억새의 독백 / 淸草배창호 홀씨 하나이고 삭힌 땅거미 내리듯 잎새 달이 엊그제 같았건만, 텅 빈 속 뜰에 마른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리면 어이 하리야! 아름다운 것일수록 머무름이 짧다지만 속울음 터뜨릴 그루터기만 남았는데 바람에 전하는 속엣말이지만, 목적 없는 장단에도 의연하게 잉걸불의 열정인 줄만 알았는데 훌훌 벗어버린 섶 대궁에 잰걸음의 거칠은 들녘에는 하얀 포말이 쉴 새 없이 일렁인다 어찌 이름조차 억새라고 불렀을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도 억척을 그대로 빼닮은 걸작이거늘, 다가올 삼동三冬의 겨우살이도 서걱이는 혼신을 다한 살풀이로 세상사 놓고 간 깊은 상념에 들 테지만

입동立冬의 겨울나기 / 淸草배창호

입동立冬의 겨울나기 / 淸草배창호 그믐밤이 쪽잠에 든 초승달 재촉해도 빙점氷點의 찬 서리에 시든 억새, 메마른 바람 소리만 듣다가 때아닌 눈꽃으로 한소끔, 일어나니 또록또록 허옇다 어둑살 촉촉이 젖어 드는 떠나보낸 질곡에는 젖빛 운해로 덮여 조촐히 바라보는 일조차 회한에 든 슬픈 낮달처럼, 못내 처마 끝 휘영청 걸려있을지라도 겨울비 닮은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져버릴 수 없는 번민의 몹쓸 정을, 벚나무의 한 잎 단풍도 가물가물 희붐한 안개 속에서 사뭇 환상적인데 이별은 만남을 위한 준비라지만 강물이 흘러가듯 날 새면 이내 통정通情하길 바라는 마음인데도 범생의 가난한 겨울나기는 엊그제 텅 빈 충만조차 내려놓았건만 외따로이 눈꺼풀만 하얗도록 무겁다

억새(推敲) / 淸草배창호

억새(推敲) / 淸草배창호 간밤에 내린 찬 서리에 온 산천이 허옇게 얼어붙었다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생애를 내맡긴 입동立冬의 하얀 면사포, 가녀린 흐느낌이 슬프도록 그윽하다 유장할 줄만 알았던 시절 인연에 한 순의 빛살처럼 펼친 지순한 사랑! 별리가 있는 이 가을에 내려놓는 텅 빈 충만이 상념에 묻힌다 해도 강물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데 겨울비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촉촉이 적셔진 그리움 바람에 띄우듯 이내 사위어 가는 생명의 질서에 차마 지난날 붙잡을 수 없었기에 이별은 만남을 위한 것이라 한다지만

반석盤石 / 淸草배창호

반석盤石 / 淸草배창호 커다란 너럭바위, 어둑한 산그늘을 받쳐 든 산하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생멸의 질서가 따로 없는데 빼어나서도 아니라 있어야 할 그만치에 계곡의 달을 품은 달바위의 농월정弄月亭처럼, 세파에 덕지덕지 튼 틈새를 노리는 몸에 밴 관습이 유한의 경계를 허물지 못하고 생경을 앓는 뒤얽힌 화음의 야단법석으로 갈葛, 등藤, 사슬의 고리가 좁은 집착의 문에 갇힌 갈애葛愛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옹이가 박혔는지 모른다 장강의 너울은 날로 유토피아를 향하건만, 풍화도 마다치 않은 울림을 베개 삼아 외곬이 대쪽 같아서 낙향의 귀의歸依이면 어떻고 안식安息의 누각이면 어땠을까, 바람서리에도 잘도 견뎠는데

가을 앓이 / 淸草배창호

가을 앓이 / 淸草배창호 낙엽이, 돌 개천 기슭을 타고 서정敍情을 펼치는 산자락에 밤새 무서리 하얗게 덮여 눈부시게 빛나든 그날이 엊그제 같았는데 가고 옴의 결 따라 처연히 저문 가을아! 차마 내칠 수 없는 내밀內密한 그리움이 울림 없는 메아리가 되었어도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가 소절素節의 하늘을 그대로 빼닮은 듯이 메밀밭 소금꽃으로 등燈을 밝히려 합니다 이슥해 가는 눈길 닿는 곳마다 소슬한 솔바람이 스칠 때 산은 불타는 노을로 화답하고 있건만 강둑에 나앉아 공허한 가슴을 쓸어내리는 신열로 사윈 대궁으로 남은 억새의 독백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읊조리듯 가을 앓이조차도 손에 닿을 수 없는 저버릴 수 없는 곡절의 까닭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