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이웃과 나누는 일이 최상의 수행 / 법상스님

덕 산 2023. 9. 17. 21:50

 

 

 

 

 

이웃과 나누는 일이 최상의 수행 

 

이웃이란 나누어 가지는 사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다고 해서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나누어 가짐으로서 굳게 맺어지고 하나가 될 수 있다.

즐거움을 나눌 때는 그 즐거움이 몇 곱으로 늘어나고,

괴로움을 나눌 때 또한

그 괴로움은 훨씬 가벼워진다.

나누어 가짐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이 따른다.

 

오늘날 우리들은 선뜻 나누어 가질 줄을 모른다.

또 그러기를 주저하고 있다.

저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관계의 이웃으로 길을 트려고 하지 않는다.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만 급급한 나머지

덕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이루어진 이웃과의 관계도

자신에게 이익이 없으면 더 지속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관계를 떠나 홀로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다.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영역이 그만큼 확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화엄경 보현행원품(華嚴經 普賢行願品)〉은

구도자의 수행으로써 나누는 일을 말하고 있다.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강조한다.

나누는 일이 곧 구도자의 일상적인 행동이고 소원이며,

그것이 또한 법계에 도달하는 여로, 즉

진리를 구현하는 길임을 열어 보인다.

나누는 일을 여기서는 열 가지로 들고 있다.

예배·공경, 찬탄, 공양, 참회, 함께 기뻐함, 설법을 청함,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원함, 본받아 배움,

이웃의 뜻에 따름, 돌려 보내줌 등으로써

나누는 일을 삼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몇 구절을 들어 진정한 나눔이

어떤 것인가를 음미해 보려고 한다.

 

공양(供養)이란 문자 그대로

받들어 올리는 일이고 봉사하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으뜸가는 공양인가.

모든 공양 중에서는 법공양이 으뜸이라고 전제,

그 내용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것,

우리 이웃들을 이롭게 하는 것,

이웃을 거두어 주는 것,

이웃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 것,

착한 일을 하는 것,

보살의 할 일을 버리지 않는 것,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공양보다는 직접

몸으로 작용하는 덕스러운 행위가 법다운 공양임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이런 출세간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부처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곧 부처님을 출현케 하는 일이고,

보살이 법공양을 행하면 이것이 곧

부처님께 공양하는 거나 다름이 없기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참다운 공양이다.”

 

공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음식이나 의복 등을 연상하기 쉬운데,

진짜 공양은 물질적인 것보다도

그뜻을 받들어 몸소 행동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것은

값비싼 공양거리로써 잔뜩 쌓아 올려 법석을 떠는 일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몸소 행동하는

그 일 자체가 곧 진정한 공양이고

또한 부처님을 지금 이 자리에 출현케 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행동이야말로 실다운 수행이라는 가르침은,

불교의 실상이 어디에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 이웃의 뜻에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말한 이웃이란,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생물을 통틀어 말한다.

 

이런 모든 이웃들에게 순종하면서 섬기고 공양하기를,

마치 내 부모와 같이하고 스승과 같이하며

성자나 다름없이 받들라는 것.

그래서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주고,

길잃은 이에게는 바른길을 가리켜 주며,

어둔 밤에는 등불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재물을 얻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이웃을 평등하고 이롭게 받들고 보살피는 것이

진리를 몸소 구현하려는 보살이라는 것.

 

“보살이 이웃의 뜻에 따르는 것은

곧 부처님께 순종하여 공양하는 일이 되고,

이웃을 존중하여 받드는 것은

부처님을 존중하여 받드는 일과 다름이 없으며,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곧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몸소 행동하는 것이

곧 부처님께 올리는 진정한 공양’이라는 의미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진리를 사랑하고

구현하려는 보리심을 발하게 되며,

또한 보리심으로 인해 마침내는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어디까지나 우리들 이웃에게 딸린 것.

만약 우리에게 구체적인 이웃이 없다면

우리는 해야 할 일도, 깨달음도 이룰 수 없을 거라는 논리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하는

우리 이웃의 존재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해서, 이웃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들 이웃에게 멀고 가까움이 없이 마음을 평등히 함으로써

원만한 자비를 성취하고, 자비심으로 이웃의 뜻에 따라줌으로써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란 말은,

공양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한결같이 역설하고 있다.

진리를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는 보살은

그 염원 또한 지극해서, 조그마한 선행으로

자기만족에 도취되기 쉬운 우리들을 일깨우고 있다.

그래서 나누어 가질 때 마다 이런 다짐으로

끝없는 구도의 길을 스스로 일깨운다.

 

“허공계가 다하고, 우리들 이웃의 세계가 다하고,

이웃의 업이 다하고, 이웃의 번뇌가 다 할지라도

내 보살의 행은 다하지 않는다.”

 

이런 다짐과 행동이 한순간도 쉼이 없이 지속되면서도

몸과 말과 뜻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보살의 의지이고 나누어 갖는 보살행이다.

이렇듯 지극한 보살은

그럼 누구이고 그런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보현보살이란 경전에 나오는 과거의 특정 인물만이 아니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지금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우리들 자신,

자기 존재를 철저히 자각한 내 자신일 수 있다.

또 보현보살의 그토록 간절한 행동양식은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관심,

즉 끝없이 나누는 기쁨에서 움틀 수 있다.

 

마음과 부처와 이웃은 근원적으로 차별 없이 하나를 이룬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한

화엄경의 사상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누는 기쁨’을 다루고 있는 보현행원품은

화엄경 입법계품 안에 들어 있는 법문이다.

입법계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

다시 말하면, 이웃과 나누어 가짐으로써

진리의 세계(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지만,

대개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대수롭지않게 비하한 나머지

묵혀둔 채 녹이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의 존재의미를 철저히 자각하게 되면

일반의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입법계품을 다른 표현으론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전(不思議解脫)이라고도 하고,

혹은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는(入不思議解脫境界)

보현행원품이라고도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의하면,

선재동자라는 젊은 구도자가 문수보살에 의해 보리심을 발하여

53선지식을 차례로 방문한다.

찾아간 선지식에게 진리를 묻고 법문을 들으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가는 그 머나먼 구도의 여로에서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찾게 된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공덕은 우리들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하면서,

열 가지 큰 행원을 쌓아야 그 같은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행원이란 행동과 소원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를 이룬다는 뜻.

즉 행동은 소원에 뿌리를 내려 있고, 소원은 곧 행동으로 드러남이다.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이

지혜를 상징한 문수보살로부터 출발하여

온갖 덕행을 상징한 보현보살에 이르러 마치게 된다는 것은,

불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을 통해

여러 계층의 이웃과 끝없이 나누어 가짐으로써

자유(해탈)와 평화(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열 가지 행원은

참을 추구하는 모든 구도자가 걸어가야 할 보편적인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인간의 길’이기도 하다.

 

- 보현행원품 해제: 나누는 기쁨 중에서

 

- 길상사 월간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山房閑談) 2016년 09월 -

 

 

 

'향기로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사랑을 하세요. / 법정스님  (0) 2023.09.20
이해와 오해  (0) 2023.09.19
인간과 인형 / 법정스님  (0) 2023.09.15
인간과 자연 - ② / 법정스님  (3) 2023.09.14
인간 부재의 시대 / 법정스님  (0) 2023.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