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죽서루, 저무는 / 이향숙

덕 산 2021. 3. 20. 08:54

 

 

 

 

 

죽서루, 저무는

                 - 이 향 숙 -

 

 

둘이 겸상하네요

누군가 싱거운 말 할 때

슬쩍 한 자리 비껴서 마주 앉은 부부처럼

그런 은근한 자리

 

며칠 동안 미열이 오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릿대 숲에 서걱서걱 잔바람이 일었는데

 

서쪽 끝에 지은 누각이라고 했다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을 용모였다

소문도 없이 조용한 일몰이 아름답다

죽서루 절벽을 모로 베고 누운 강은

오십 번이나 아래에서 위로 건너야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했다

 

오십천에 열배를 더하여도

오십천에 백배를 오르내린다 해도 나아갈 수 없는

날 들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어 찬 불덩이가 활활 쏟아지는

장작더미 같았다

 

그때

뜨란 대나무 숲에서 누군가 속울음처럼

젖는 것이다

이명처럼 들어 앉아 있던

오래 된 작은 누각 하나가

퉁 울림소리를 내며

 

서쪽 어디 끝으로 천천히 저무는 소리가

 

내 귀에 분명,

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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