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 논설위원
입력 : 2015.09.22 03:00
아들아, 내 편지를 보아라. 나도 은퇴가 코앞이다. 어느 날 임금피크제란 말이 들렸다.
뜯어보니 내 얘기더라. 대통령이 말하는 4대 개혁의 본질은 '세대 전쟁'에 있다고들 했다.
불현듯 그게 너와 나 사이 전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했다.
노사정이 합의한 노동 개혁의 첫머리에 '취업 규칙 변경'이란 게 있다.
점잖은 말로 포장돼 있지만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았다.
정년을 3년 앞둔 경우 내년에 봉급을 10~30% 깎고, 그 이듬해 다시 그쯤 깎아
퇴직 마지막 해엔 지금 봉급의 절반만 받으며 1년을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정부나 회사가 여력이 생기면 젊은 너희에게 일터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내 봉급이 절반이 깎여도 네가 좋은 일자리를 붙박이로 얻는다면 내가 무슨 불평을 하겠느냐.
그러나 한 발짝만 더 따져보자. 네 동생 둘은 어쩌란 말이냐.
앞으로도 걔들은 돈 들어갈 일 천지다. 내년 봄 네 결혼 자금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아비가 평생 마련한 아파트라도 헐어서 궁리해보라는 뜻이냐. 네 생각도 그러냐.
외국에서는 '잡 셰어링(job sharing)'이라고 부르더구나.
그게 사회 정의라면 얼마든지 나눠 가질 용의가 있다. 그러나 할 말이 있다.
내가 네 나이일 때 나는 주어진 대로 살았다. 너희는 '삼포 세대'라면서
결혼·직장·출산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만 우리는 그런 것 몰랐다.
이층 양옥의 북쪽 모퉁이 방에 철제 계단 타고 올라가는 전세를 살았고,
그도 안 되면 헛간 같은 지하 단칸에 신혼을 꾸렸다.
직장도 그렇다. 실력이 있으면 사법시험도 붙고 은행도 들어갔지만 그게 안 되면
벽돌도 나르고 리어카도 끌었다. 분수에 맞게 벌고 살림을 차려 부모님께
손주를 안겨 드려야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주어진 대로 살았다는 뜻이다.
너희는 '포기'가 무슨 선택쯤 되는 줄 알더라만 나는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선배들께 그렇게 배웠다.
힘은 합하고 고통은 나눠야겠지. 나도 안다. 그러나 우리를 높은 연금에
탐욕스레 집착하는 볼썽사나운 기성세대라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어느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너희의 젊음이 상(賞)으로 받은 것이 아니듯
우리가 늙어가는 게 벌(罰)이 아니다.
지금 노동시장이 왜곡돼 있는 건 우리 세대 잘못이 아니다.
징징대지 마라. 죽을 만큼 아프다면서 밥만 잘 먹더라.
나는 지금도 너희 세대보다 무거운 것을 들고, 너희보다 오래 뛸 수 있다.
밤샘 일도 너희보다 자신 있다. 너희가 컴퓨터와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잠시 움찔했다만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너희는 불대수를 바탕으로 한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나보다 이해하지 못했고,
상대 눈빛을 제압하며 계약을 따내는 실전 영어도 우리가 월등 나았다.
너희 영어는 혀에 '빠다'를 바른 듯 R과 L, F와 P 발음을 잘 구별하더라.
그것도 우리 기러기 아빠들이 외로움 참아가며 너희를 어미와 함께 외국에 보냈던 덕이다.
아비 혼자 불어터진 라면을 먹고, 아비 혼자 늦은 밤 욕탕에서
'난닝구 빤쓰' 빨며 외로운 눈물을 삼켰다는 것을 너희는 모른다.
그러나 나라 상황이 우리에게 양보하라면 양보하겠다.
아비가 제일 잘할 줄 아는 게 희생밖에 더 있더냐.
다만 우리 세대를 죄인 취급하면 섭섭하다. 정말 화산처럼 분노할지 모른다
- 출 처 : 조선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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