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 봄볕
- 이 향 숙 -
주목은 웃자라서 제멋대로구요
오른쪽으로 쏠린 살구나무는 서툰 분홍 입술
빼물고 있어요
서로 다듬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 무관심했던 것 뿐이죠
자주 들뜬 마음이 구름처럼 솟았다가 한 순간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 빠지듯 하던 날들이었나 봐요
손길 못 받고도 자라줘서
눈길 안 준 거리만큼 잘 버텨줘서
그저 고맙다는 말을 눈치로만 읽어내죠
당신의 속눈썹은 너무 짧아서 해독이 어려워요
채 꽃 피우지 못한 목단이 제 붉음을
뱉어 내기 직전 둥근 치마를 말아
머리 꼭대기까지 둘러쓰고 있어요
곧 꽃 틔울 일만 남았는데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이즈음의 빛들은
서쪽으로 어스름 쏠린 은비녀를 꽂고
낭창낭창 버선발로 들어오는데
비스듬하고 촉촉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너무 좋아요
벗어 둔 오래 된 내 구두에 곰팡이꽃 핀 것조차
잊을 뻔 했어요
그렇게 허름한 화단 담벼락에 온통 푸른 그림자
꽃 문신을 새겨 넣고 당신은
선물처럼 왔다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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