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시인님 글방

4시 봄볕 / 이향숙

덕 산 2021. 3. 13. 13:05

 

 

 

 

 

4시 봄볕

         - 이 향 숙 -

 

 

주목은 웃자라서 제멋대로구요

오른쪽으로 쏠린 살구나무는 서툰 분홍 입술

빼물고 있어요

 

서로 다듬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 무관심했던 것 뿐이죠

자주 들뜬 마음이 구름처럼 솟았다가 한 순간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 빠지듯 하던 날들이었나 봐요

 

손길 못 받고도 자라줘서

눈길 안 준 거리만큼 잘 버텨줘서

그저 고맙다는 말을 눈치로만 읽어내죠

 

당신의 속눈썹은 너무 짧아서 해독이 어려워요

채 꽃 피우지 못한 목단이 제 붉음을

뱉어 내기 직전 둥근 치마를 말아

머리 꼭대기까지 둘러쓰고 있어요

곧 꽃 틔울 일만 남았는데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이즈음의 빛들은

서쪽으로 어스름 쏠린 은비녀를 꽂고

낭창낭창 버선발로 들어오는데

비스듬하고 촉촉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너무 좋아요

 

벗어 둔 오래 된 내 구두에 곰팡이꽃 핀 것조차

잊을 뻔 했어요

그렇게 허름한 화단 담벼락에 온통 푸른 그림자

꽃 문신을 새겨 넣고 당신은

선물처럼 왔다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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