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 법정스님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이 시대 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줄로 맺어져
서로가 믿고 기대면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낮 동안은 바다 위의 섬처럼
저마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우리가 귀소의 시각에는
같은 대지에 뿌리박힌
존재임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
우리들의 현실은
지나간 과거처럼 보인다.
이삭이 여문
논밭은 황홀한 모자이크.
젖줄 같은 강물이
유연한 가락처럼
굽이굽이 흐른다.
구름이 헐벗은 산자락을
안쓰러운 듯 쓰다듬고 있다.
시골마다 도시마다
크고 작은 길로 이어져 있다.
아득한 태고적
우리 조상들이
첫걸음을 내디디던 바로
그 길을 후손들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길을 거쳐 낯선 고장의
소식을 알아오고,
그 길목에서 이웃 마을
처녀와 총각은 눈이 맞는다.
꽃을 한 아름 안고
정다운 벗을 찾아가는 것도
그 길이다.
길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맺어준 탯줄이다.
그 길이
물고 뜯는 싸움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끼리 흘기고 미워하는
증오의 길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 같지 않대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인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그런 것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 다음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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