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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무아가 모순이라고? / 법상스님

덕 산 2024. 3. 12. 09:06

 

 

 

 

 

윤회와 무아가 모순이라고?

 

“만약
나라는 것이 없다면
누가 후세에 윤회하여 태어난다는 말씀입니까?”

“과거세에
번뇌로 말미암아
여러 업을 지은 까닭에,
그 업에서 현재의 몸이 생겨났으며,

현재에
또 다시 여러 업을 짓는다면
다음 생에 다시
그 업에 해당하는 몸을 받게 된다.

모든 조건이 결합되어
씨에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

씨에서 싹이 트기 위하여는
그를 돕는 조건이 필요하고
싹의 성장을 위해서는
씨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씨와 싹의 관계에 있어서,
씨가 없어지는 점에서 볼 때에는
지속함이 없다고 해야 하지만,
싹이 나는 점에서 볼 때에는
단절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무아(無我)이지만
업보를 받아 윤회하는 것 또한
바로 이 씨와 싹의 관계와 같다."

[대장엄경론]

‘불교는 무아라고 하면서 왜 윤회를 주장하는가’
에 대한 논란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질문이며
지금 이 순간도 어김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것이 왜 모순인가.
이 두 가지 사실은 전혀 모순되어 있지 않다.

무아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할 텐데
윤회하는 주체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아(我)’가 아닌가 하고 묻지만,
윤회의 주체 또한 공하고 텅 빈 무아일 뿐이다.

윤회의 주체를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하지만,
그 아뢰야식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연생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다만 다른 것들은
이번 생에 한정되어 나고 죽지만
아뢰야식은 다음 생까지 간다는 그 점이 다를 뿐이다.

업이 저장되는 곳이 아뢰야식이다.
업이란 말과 생각과 행동이다.
말과 생각과 행동은 언제든 변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업도 늘 변한다.

지금 나의 업과
몇 십년 후 나의 업은 상당히 변화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람 몸을 받았지만
축생의 업을 지으면 개, 돼지 같은 짐승의 업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많이 지었다면 지옥의 업을 받는다.

육도윤회를 한다는 말은
그렇듯 업이 변화한다는 증거이다.

씨에서 싹이 트면 씨는 사라져야 하듯,
다음 생으로 윤회를 하면
전생의 ‘나’는 소멸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여전히 전생의 나였기에
단절되었다고도 할 수 없고
지속된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끊임없는 변화만 있을 뿐,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서의 윤회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는 없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이다.

 

-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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