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 / 법정스님

덕 산 2024. 3. 4. 08:35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 

 

우리들이 태어나서 살아온 20세기가 막을 내렸다.

한 세기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기가 다가서고 있다.

현재의 우리들은 크고 작은 전쟁과 재난과 온갖 시련과 갈등 속에서

죽지 않고 용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헤쳐 오느라고 힘겨웠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새 천년을 두고

방송과 신문마다 요란스럽게 떠들어대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는가?

끊어짐도 없고 끝도 없는 그 시간에

사람이 금을 긋고 토막을 내고 있는 것이다.

시간 자체는 하나의 존재,

그것은 허공처럼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있다.

 

누가 묻더라.

스님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느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을 뿐 미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라고.

우리는 바로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

바로 지금이지'그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다음 순간을, 내일 일을 누가 알 수 있는가.

 

들으니, 새해맞이 하겠다고

지금 동해안 일대의 호텔과 숙박소는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소식을 해가 듣는다면 사람들을 보고 웃을 것이다.

어제 뜬 해와 오늘 뜬 해가 다른 해인가.

이런 짓은 분석과 분별을 좋아하는 서양 사람들의 호들갑이다.

동방의 후예들도 지금 여기에 놀아나고 있다.

 

스님들이 놀고먹는다는 세간의 비난을 듣지 않도록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장하며 몸소 실천한 학명(鶴鳴) 선사는

이렇게 읊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이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지난 20세기에 인류가 발명한 연장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컴퓨터로 불리는 전자계산기다.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 놓은 연장인데

이제는 이 연장이 사람을 부리고 있다.

 

정보화 사회란 무엇인가?

이 컴퓨터 놀음이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이 컴퓨터가 주인이고 사람은 그 시중꾼이다.

사각 스크린 앞에서 그 지시를 엄숙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사람의 신세가 처량하고 불쌍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컴퓨터에는 영혼이 없다.

 

미래에 대해서 잘은 알 수 없지만,

날이 갈수록 이 마법의 상자 앞에서

인간의 존재는 점 소멸되어갈 것 같다.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일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 조짐이 Y2K 문제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인식 오류는

기계와 기술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인 신뢰와 의존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얼마든지 실수를 할 수 있는 유연한 존재다.

이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약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면

그 오만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완벽주의를 경계한다.

그것은 차디차고 비인간적인 금속성이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겸허해지고,

새롭게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연장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활의 도구일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것을 믿고 의지한 만큼

언젠가는 그것으로부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이제는 개체와 전체의 상관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조화와 균형이 깨져

전 지구적인 재난이 닥쳐오고 있는 이 불안한 세기에,

무엇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일찍이 《화엄경》에서는

개체와 전체의 상관관계를 소상하게 설파하고 있다.

모든 현상의 근원은 원만하고 막힘이 없어

어떤 차별이나 갈등도 없다.

그것은 본래부터 질서정연한 조화와 균형의 세계다.

 

신라의 의상 스님은

화엄사상을 압축해 놓은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여기 조화와 균형의 소식이 있다.

전체와 개체의 상관관계가 있다.

나는 독립된 외톨이가 아니라 여럿 속의 그 하나다.

따라서 관계된 세계가 없으면 내 존재는 무의미하다.

 

'나 하나쯤 어떠랴'

'나 혼자 그래봤자'

이런 생각이 지금과 같은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환경의 훼손과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온 것이다.

내가 곧 흙이고 물이고 공기이고 지구라고 생각을 돌이켜야 한다.

내 자신이 곧 인류이고 우주라고 생각해야한다.

 

담장을 쌓는 데는,

크고 작은 돌과 모나고 둥근 돌이 다 필요하다,

여기에 조화와 균형의 비밀이 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앞으로 닥쳐올 세상이 사람이 살아갈 만한 세상으로 바뀌려면,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당신과 나의 생각과

생활 습관부터 달라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21세기에는 현재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대부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물론 우리 후손들이 이 터전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렇듯 유한한 인간이

한정된 자원의 지구촌에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욕망을 자제하며 덜 쓰고 덜 버려야 한다.

이 다음에 올 우리 후손들의 몫을 남겨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구는

무기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거듭 각성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구가 병들면 그 안에 있는 당신과 나는 살아갈 수 없다.

조화와 균형의 소식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 법정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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