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과 그 용도
김홍우(khw***) 2019-06-06 17:32:18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으므로 생명을 걸고라도 양보할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는 양심의 굳은 고집(!)을 일컫는 말이 바로
‘소신’입니다. 오래 전 저 어렸을 적에는 “소신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어르신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많이 들었고
사회의 정서와 분위기도 그러하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소신(所信)보다는 처세(處世)를 앞세우는 것
같은 말들을 어렵잖게 들을 수 있기에 쯧쯧 고개를 가로 젓곤 합니다. 이러한 즈음에 그래서 생각나는 것은 “체면이
밥 먹여 주냐?”했던 오래 전 유행어입니다. 이제는 바야흐로 ‘소신이 밥 먹여 주냐..’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일까요..
‘밥’과 연관되거나 연계 혹은 연결 된 당대의 유행어들은 그 시대적 상황이나 현재의 풍속모양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밥’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사람의 ‘먹고 사는 일’을 통틀어 단번에 아우르는 광의적 표현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기에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지요. 우선은 ‘먹고 사는 일’이 가장 급했던 시절 속 장면들이 있었고 이제는
그런대로 굶지는 않을 정도로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된 지금에 와서도 긴 한숨으로 그때를 돌아보게 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나이 70에는 이르려면 몇 년을 더 있어야 하지만 제 나이 쯤 된 사람에게 ‘먹고 살만한’ 이라는
형편의 기준은 ‘굶지 아니하는’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지금도 물론 가난하고 궁핍하여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굶어서 죽는’데까지
이르거나 또 방치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의 빈자(貧者)를 위한 정책도 유효한 것으로 실행되고 있고.. 끼니 잇기를 고민해야 하는 이들의 한 끼를 해결하여 주는 기구나 단체들이 선하고 착한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되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거개의 사람들 인심 역시도 아직은 누구이든 이웃이 ‘굶어 죽는’데 까지 이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는 것에 버금가는 날들을 지내는 이들이 있어서 어쩌다 귀에 들려 올 때면..
휴... 누가 굶어 죽었다더라.. 누가 얼어 죽었다더라.. 하는 말을
어렵잖게 들으면서 자라오고 지내왔던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짠한 마음이 됩니다.
잊어지지 않는 것은 그때.. 함께 들려오는 이야기들 중에는 그 사건의 당사자 된 이들이 그러한 ‘죽음을 스스로 택하였다’라고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설마..? 하게 되지만.. 과연 살다보면 ‘죽음 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일들이 있구나 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여전히 비감한 모양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 중에는 (물론 들려온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내가
죽으면 죽었지..”하는 모양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사실이라면 그것은 결코 아니지요.. ‘죽으면 죽었지..’라고 하는 말은
어떤 경우에서 가치 있는 성립이 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악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신의 생명을 그러한 평가절하한 모양으로 내어 놓는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모양인 것으로서
곧 ‘자신에 대한 살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양과 모습은 그래서 결코 어떠한 ‘소신’의 모양일 수도 없고 오직 ‘고집으로서의 자멸’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곧 ‘소신’이란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것이어야 하되 또한 분명히 ‘정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만으로 치닫는 것은 비록 ‘자기사랑’의 모습은 될망정 ‘자기소신’의 모습으로는
승화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생명은 물론 몸 역시도 사람의 과학이나 기술로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에 온전히
자신의 것 곧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아무리 원하고 또 원해도 내 맘대로 ‘젊고 늙음을 조절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해 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가끔씩 그러한 모양으로 또 다른 이들의 생명까지도 불러내서 동반자살을 하였다는 기사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고 아주 악한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나아가기 까지는 그렇듯 ‘크게 잘 못됨’ 속에 있게
되었고 또 ‘아주 악한 일’을 당하게 된 처지와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누군가의
생명을 그렇게 끊어서도 끊어놓아서도 안 됩니다. 나에게 그럴 권한도 권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다시 한 번 살 길을 찾았어야지’ 하시면서 혀를 차시던 어르신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쯧.
당사자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짐승이
아닌 사람들.. 어떻게든 나와 너의 악한 것을 막아내야 할 사명도 임무도 있어야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기 까지 당사자들의 영육의 고통은 어떠하였기에 그러한 극단의 모양으로 치달았을까마는..
그러나 또한 그렇게 자신이 죽어 누워있는 모습을 내려다보아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래전.. 철없던 아이의 마음조차도 아프게 하였던 가난한 시절 속의
안타가운 장면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물론 ‘굶어 죽게 된 상황’ 앞에 서게 되지 않는 것이 물론 가장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의 생명연장의 모양으로 나가게 되더라도 생명만큼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빠삐옹처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물론 비굴과 속임 그리고 배신의 모양으로 살 길을 찾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여 기식의 보존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존재의 격’을 놓아버리는
것으로서 혹 생명은 보존 할 수 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존귀와 존엄이 유지 되지 아니하는 삶을 그때부터 이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그냥 ‘숨을 쉬고 있는’ 존재로의 몰락을 이루게 되고야 마는 것이지요.
이제는 아주아주 오래 된 일들이고 이야기들이지만.. 부하들을 살리느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강재구 소령이나
이원등 상사 같은 이들의 혁혁함과 고고함은 자신은 물론 아니고 가족도 아닌 누군가의 생명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생명과 삶을 모두 바쳤다는 점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모습은 당시 화급을 다투는 다급하고 긴박한
상황 속 현장에서 순식간에 내려진 ‘희생의 각오로의 결단’으로서 평소의 ‘소신’을 실천한 것이라거나 실행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일상에 녹아든 자신의 모습들이 그러한 순간의 결단으로 나타났고 그렇듯 의로움으로 산화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중요하고 고귀한 것은 ‘나 살길’을 찾기에 앞서 ‘너 살릴 길’을 찾았고 턱을 괴어볼 겨를도 없는 순간의 결정으로
자기결재(!)를 해버렸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가족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과 모양들을 접하게 되면서 울부짖었을
것이지만.. 그 이름만큼은 고귀한 이름이 되어 만인들의 가슴에 새겨지고 ‘오직 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속에
고결함과 숭앙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누구든지 언젠가 피할 수 없는 ‘때의 순간’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같은
결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기결단의 포석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어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의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라고 한 것이던가...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 아니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사는 모양들 속에는 언제나 선한 양심을 그 바탕으로 하는 ‘소신의 사람’
들이 필요하고 그렇듯 자신을 생명까지도 내어 놓는 ‘결단의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러한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고 둘러보며 찾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나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과감하고 담대히 실천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뭇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끌고 북돋우며 인류가
이의 없이 짊어질 의의 사조를 세우는 데에 크게 일조하며 공헌하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인류의 스승’들입니다.
“말이야 쉽지..”
라는 말도 많이 들어 보았는데 지금의 사람들도 역시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휴 그렇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야
누구이든 무슨 말이든 그냥 내뱉듯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굳고 변함없는 자기 소신으로 자신의 삶을 계속 이끌고 주도하여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래서 과연 결단이고
역사입니다. 또 그러한 사람만이 ‘일이 닥쳤을 때’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이끌어 ‘일이 닥치는’현장에 자기 자신을
산화의 모습으로 세워놓을 수 있는 것인데 예를 들면 ‘안중근 의사’같은 사람입니다. 이름 뒤에 붙여진 의사(義士)라는
말은 갑작스런 충동적 결심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어진 ‘소신의 삶’의 결과로만 나타나는 것이며
거기에 주어지는 영광의 이름입니다.
지금 어떤 소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분명하고도 정의로운 소신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줄로 압니다.
혹 아무런 자기 소신도 없이 그저 세상 흘러가는 대로 함께 흘러가는 모양은.. 분명히 아니겠지요..? 또 아니어야 하고요..
그래요 사실 ‘소신’을 가지고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많은 모양들이 ‘자신의 유익’만을 지키기
위한 소신을 줄기차게 붙잡고 살아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소신이 아니라 고집이며 아집이고 이기입니다.
수많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워진 피의 역사를 지나 작금 곧 21세기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이제는 나의 삶속에서 언제나
활화산처럼 타오르며 결코 꺼질 줄 모르는 불길 같은 분명하고도 정의로운 소신 한 가지쯤은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가벼이 입에 담고 올리는 소신이란 쯧, 자칫 거창한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보다는 내가 능히 감당할 수 있고 또
꼭 감당하여야 한다는 결심과 다짐으로서의 작은 그러나 분명한 소신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훈련의 과정으로
이끄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나약함을 억지로라도 키우내는 심정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한 가지를 권면 드리게 됨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곧 ‘어떠한 경우에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라는
결심과 각오를 소신으로 뜨겁게 품에 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곧 죽기까지 지키는 모양을 잃지 않는 것인데
그렇게만 한다면 오늘날 이처럼 험하고 거칠며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품어야할 여러 소신들 중
절반은 품게 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거짓’은 사람을 망치고 망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들며 짐승이 되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모든 악한 것들의 행진 속에서도
가장 앞서서 마구잡이로 걷어차며 나아가는 놈입니다. 이것을 물리치지 못하면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삶의 모양을 다 내팽개쳐버리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이러한 거짓을 버리는 사람만이 정직(正直)
곧 바르게 서는 사람이며 바르게 선 사람만이 온갖 세상의 악한 행패를 아닌 듯 다 이결 낼 수 있습니다.
“나의 혀가 간교하게 거짓을 말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라는 소신은 그래서 귀하고 소중하며 가장 중요한 것들
중에서도 맨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용장의 모습을 과연 ‘물러설 수 없는 소신’으로 가지게 되기를 힘주어 권면 드립니다.
거짓은 모든 ‘불행과 패배의 앞길 잡이’인 것이며 정직은 모든 ‘행복과 승리의 앞길 잡이’가 되는 것을 믿고 또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렇듯 짧기만 한 인생여정을 ‘짐승 같은 사람’의 어두운 날들이 아닌 ‘사람 같은 사람’의 빛나는 날들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라며 또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산골어부 201965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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