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9-06-04 16:52:16
막말이란 “나오는 대로 함부로 또는 속되게 하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합니다. 그 설명속에 나오는
‘함부로’라는 말도 “사리를 분별하지 않고 되는대로”라는 설명이며 또 ‘속되게’라는 말은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종합하여 보면 그저 입에서 쉽게 나오는 모양의 욕설이나 저주 또는 비아냥 등의
천박스러운 언어를 가리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말을 듣는 이의 사정이나 마음의 상태 혹은 그 말이 누군가에게 줄 상처 또는 몰고 올 여파 등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또는 개의치 않고 그냥 ‘냅다 해버리는’ 말들 그래서 ‘막가는 모양’이라는 뜻으로 ‘막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막말을 하는 사람은 물론 ‘마음이 많이 상해있는’
상태이거나 ‘화가 잔뜩 나있는’ 자신의 현재 속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미움과 원망이 가득한’ 자기 심정의
토로라고도 하겠습니다만, 쯧, 세상이 점점 더 강팍해 지고 완악하여지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근자에 들어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막말이 일으킬 앞뒤 여파를 앞서 계산하고 자신에게 올 이해득실을 잘 계산하여
‘의도된 막말’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인류사를 소급해 올라가 보아도 혹 인류 태동기 즈음의 원시인들의 사회 속 언어의 체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속에서라면 또 모를까.. 역사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막말이 없던 시대와 시절은 없었습니다. 즉,
사람은 말 즉 언어(言語)사용하는 동물이기에 그 말속에 자신의 거의 모든 자기표현과 감정의 모양을 거기에
실어내고 담아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기에 싫거나 좋은 것,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 미워하거나 살의(殺意)까지도
거기에 담아내고 있기에 그것을 듣는 사람 역시 그 말을 듣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미워하거나 경계하는 것 등으로 자기 반응 및 자기 방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전적 정의와 정답으로 애써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막말’이란 좋지 않은 것이라는 마음의 정의를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막말을 주고받는’ 상황 속에 처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경계하며 애를 쓰지만 그래도 역시 거기에 어찌어찌 휩싸이게 되는 경우를 우리 사회에서
왕왕 볼 수 있는바 깊은 한숨을 휴 길게 내쉬게 됩니다.
막말은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의 모양이 없다면
‘사회공동체’의 구성 일원으로서 적합지 않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회는 그 근본이 양보와 배려를 기초로 하는
서로 간 협동의 모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라는 얼굴 속에는
수많은 각기 다른 모양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시각과 판단으로는 ‘막말’이라고 하여도
주관적으로는 ‘정론(正)’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막말은 그 말 한 사람을
매장시키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영웅처럼 부상(浮上)시켜주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막말로 사람들의 마뜩하지 못한 부분을 잠시 북북 긁어주는 모양이 인기를 얻고
그것이 지지표로 이어지면서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로 부상을 하는’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 수는 있지만 꼭
그 대가를 불원간에 치르게 된다는 것 고래로부터 확인되어진 사실이며 그래서 정설입니다. 왜냐하면 혹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있기도 하겠습니다만 말에는 힘이 있고 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미신이나
주술신앙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우선 ‘말’에는 ‘힘’ 그것도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 가 사람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는 것이지요.
즉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무슨 사면(赦免)권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사형집행 중지 등으로 죽을 사람이
살아나고 하는 주어진 권세와 권력자의 용서와 자비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능력’에
기인하여서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의 언어는 ‘신비롭고 막강하며 기이하여 설명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전 사람들은 ‘언어의 저주’를 통하여 상대를 제거하려고 하였고 또한 ‘언어의 축복’을
가지고 자신 혹은 누군가의 복됨을 이루려 하였고 그러한 행위와 시도는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모습과 모양들이 전혀 아무런 효과와 효능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고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어 그 자체의 능력 쪽으로의 연구와 관찰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말’이 만들어내는 ‘자기 책임’의 심정적 조성과 그것을 계기로 스스로 갖게 되는 각오와 결심 그리고 입에서 나가버린 ‘그 말’이 떠돌아다니면서 조성해 놓는 상황과 상태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좋은 것 나쁜 것 혹은 악한 것과 선한 것 조성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막말’을 해대는 당사자는 자신의 막말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 받고 배척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막말에 환호하고 박수치며 지지를 보내는 이들의 모양만을 바라보면서 마치
뭔가 ‘큰 보람의 뿌듯한 일’을 하였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자가당착(自家撞着)에
스스로 빠지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말’ 속에는 아무런 진리는 물론 정의도 성의도 배려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정(正) 반(反) 합(合)의 작은 근저의 모양도 없고 그 작은 기초도 세울 수도 없는 모양으로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마구 세상에 오물처럼 뿌려지는 그냥 ‘막돼먹은 막말’일뿐이며 그것을 지껄이고 내뱉는 더러운
입과 마음이 거기에 그렇게 있고 또 그렇듯 헛된 수고에 상의도 동의도 없이 내몰린 세치 혓바닥이 있을 뿐입니다.
“속이 다 시원하다!!”
막말의 지지자들이 하는 감탄의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원함이 자칫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을
간과하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막말은 우리 사회 속 평화와 화목의 근간을 흔들어대는 ‘추하고 나쁘며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막말조차도 작금의 사회적 상황과 흐르는 현재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강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백번 양보하여서 그러한 사회현상적 유익을 다소나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악한 것은 악한 것으로 그것 우리 사회에 주는 해악은 나뿐 결과로서의 열매를 내어 놓을 뿐이지
어떠한 선함의 꽃도 열매도 피어내거나 내놓을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막말의 전성시대’가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쯧 어제 오늘 일어난 일은 물론 아니지만 점점 더 심화 되어가는
‘막말들의 잔치’ 모양에 우리 사회의 앞날에 드리워질 그늘의 악영향을 염려하며 쯧쯧 기도하게 됩니다. 막말의 생산지는
‘정치권’에서 그 선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모양이 계속되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배움의 전당인
학교에서도, 생계의 터인 직장에서도, 심지어는 선한 이름의 간판을 걸어놓은 복지 기관과 더하여서는 종교계의
거룩한 분들의 모임 가운데에서도 마구잡이로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이것저것에 다
귀 닫고 ‘나는 자연인이다’로 깊이 들어가 산중의 맑을 공기를 한껏 마시며 남은 날들을 살아가고 싶은 심정이 되어 집니다.
새마을 운동도 좋고, 아껴 쓰기 운동도 좋고, 비닐봉투 사용 않기 운동도 다 좋은 것이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이 즈음에서 ‘막말 하지 않기 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그래서 굴뚝같습니다. 우리만 살고 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 후대 후손들이 여전히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세상 우리 사회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위로는
권세들로부터 아래로는 날마다 실의에 찬 날들을 지내며 어디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를 안고 살아가는 어렵고
곤궁한 물밑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 한 번 마음을 같이하여 막말의 이빨과 독소가 만들어내는 모든 사회적
가정적 폐해와 불행 그리고 날마다 미움과 원망을 일으켜내는 ‘막돼먹은 막말’을 내가 먼저 내 입에서 물리치고
담지 않는 것으로 무슨 커다란 바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잠시 ‘서로 바라보며 빙긋이 웃을 수 있는’
내일이 기다려지는 우리 사회를 만들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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