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9-05-26 09:29:43
언젠가 ‘불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수 만 년 전 인류 태동의 시기에 처음으로 불의 유용함을
알아차린 원시인들이 ‘불을 구하러’ 나서는 모험여정을 그린 것입니다. 그럴 듯하고 있음직한 여러 연출 장면들의
전개에 허허 웃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오직 자연 속에서 ‘되어져 있는 것들’ 만을 찾아 먹고 또 잡아먹으면서
짐승의 털가죽을 걸치고 추위를 피하던 원시인들이 ‘불’ 존재의 유용함을 알게 되면서 거기에 자신들의 생존여부를 걸고
나서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그때가 생존을 위하여 ‘불을 찾아 나서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무엇을 찾아
나서야 하는 시대일까... 보고 살 일, 먹고 살 일, 갖고 살 일 들의 이름들이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삶의 궁극을 알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 시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과학의 시대.. 아니 ‘과학신봉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요. 연구와 경험으로 증명되어진 것만을 사실과 진리로
받는 모양들이 그러합니다. 쯧, 오랜 옛적에 ‘철학의 시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철학이 과학을 태동시켰으니 ‘철학은
과학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겠고 또 철학이전에는 ‘신들의 시대’가 있었던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신들을 의지하여’
살아갔던 시절입니다. 곧 ‘신학의 시대’.. 아니 ‘신들의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신(神)을 학(學)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불경의 모양이었기 때문에 ‘연구로서의 신’ 존재 파악이 아닌 ‘절대 섬김의 신’들의 시대와 시절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여러 가지 세상의 모양과 현상의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것을 바탕 지식으로 하여 온갖 사물에 대한
판단과 구별력 그리고 응용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것이 점점 신을 내려놓고 철학으로 그리고 과학으로 나아가게 된
동기이자 계기이며 이유입니다. 물론 최초의 철학시대에는 신들과의 접목이 여전하였지만 사람은 자꾸만 더 자신의
자존감을 스스로 부추기며 자립과 독립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인데 이 과정에서 안타까운 것은 “알게 된 것으로 아는 것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 본연만으로만 접목 될 수 있었던 ‘신앙과 믿음을 슬며시(!)내려 놓게 된 것이지요.
차츰 눈앞에 시야가 넓어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 역시 많아지면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람의 골똘 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응? 이거 왜 이렇지? 그런게 아니고 이런 거잖아.. 아하, 그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비극적(!) 환호의 시대를
열어 제친 것이 바로 사람들의 골똘함입니다. 아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또 사실은 모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는 것인데
이제 사람들은 모르기를 거부하고 더욱 알기만을 열망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마음의 눈으로 보는 신앙시대’는 뒤로 가게 되고 손으로 만져진 것만을 사실로 인정하는 ‘물질의
경험 신뢰시대’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신(神)’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자연 물질은 눈앞에
확연하며 관찰과 연구 그리고 자연학적 실험에 의해서 ‘신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의 현상’이라는 결과라는 것을
정답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천둥과 번개는 제우스의 진노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들 말했듯이 막연한 추상의 시대는 끝이 나고.. 아니 물러가고 오직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신봉하는 새시대(?)이자 사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시대의 도래 곧 현실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신들의 시대’는 끝나버린 것일까요..
철학이란 ‘Philosophy’라는 단어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양에 준하여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입니다. 또한 지혜란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잘 분별하는 정신, 능력, 슬기’이며 다시 또
슬기란 ‘사리를 밝혀 일을 잘 처리해 가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므로 사람이란 이 정의에 합당한 모양이 마땅히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사람은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만 토를 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이유는 ‘지혜를
사랑하여야 함’이라는 절대 명제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오히려 ‘지식을 사랑하는 철학’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쯧..
철학이 유익하고 나름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 당장의 생업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처지와 형편에서 한
사물을 향한 끝없는 골몰을 요구하는 철학을 과연 학(學)의 기준에서 다루며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반열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니만큼 사람은 최소한 나의 존재인식과 그 앞에 나누어 진 모양으로 나의 입장(入場)을 기다리고 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즉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과연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최고의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절대우선이 되는 것이지요.
철학은 인류가 얻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종합 또 조합하고 연구하고 검토하여 만들어 낸 방대한 학문들과 삶의
집대성으로서 저 같이 그 방면에 책 몇 권 읽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작은 지경조차도 용납하여 주지 않지만..
수박을 끌어안고 그 겉을 핥아 보기라도 한 사람이 수박을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보다는 그 향내를 맡을 기회라도
좀 더 가까이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그 겉 언저리를 달팽이의 모양으로 기어 다녀 보면서
잔뜩 주눅이 들은 모양으로나마 여전히 이러쿵저러쿵 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상기한바 중세까지만 하여도 세상의 지성을 지배한 것은 철학과 신학이었습니다. 철학이란 ‘지혜’로 이 세상을 곧 모든
사물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관찰하여야 참되고 변함없는 이치 곧 ‘진리’를 발견하고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과
실천이 되면서 세상의 존재와 이치 그리고 그 목적 그리고 또한 사람의 존재와 그 삶의 정의를 바로 알게 된다는 것인
반면에 ‘신학’은 오직 신을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단순 구분을 하여 볼 때에 결론은
‘믿음의 지혜’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지혜에도 종류와 구분이 있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자칫 ‘꾀’의 모양이 되어서 세상풍속도 속에서의
처세술 정도로만 흐를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은 ‘지혜의 근본’ 그 원천과 원류에 대한 지식도 이해도 없을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온전한 지혜’의 시작은 세상은 무엇이며 보여지는 모든 것의 시작은 어떻게 되어진 것인가 하는
명제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어리석고 무지한 어떤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즉 사람의 존재의
시작에 대하여서도 ‘오래 전 어느 시간 속에서 미네랄과 아미노산과 탄수화물이 우연히 조우하고 조합하여 생명이
시작되었고 사람의 존재도 역시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을 날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유사 이래로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사람들의 끊이지 않는 상념으로 사람을 골똘케 하고 불안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반면에 또 기쁘고 즐거우며 행복하게도 하는 가장 큰 줄기는 바로 ‘신(神)’의 존재여부와 인간과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큰 나라 작은 나라는 물론 열 서너 명이 모여 사는 작은 가족 단위 부족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이 정성으로 모시는 신이 있고 신당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양들을 보면서 ‘신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거대한 자연의 구성과 현상 그리고 그 위험과 위협 앞에서의 자신들의 나약함과
무능력을 확인하고는 생존과 생활 속에서의 안전함과 평안함을 얻고자하는 갈급함이 자신들의 보호자 신을 만들어 내어
거기에서 마음과 삶의 안정을 얻고 힘을 얻는 것으로 쉼 없이 계속 되는 생활의 현장 속 당면문제들을
헤쳐 나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 속에서 ‘신의 존재’를 내려놓게 되지만 반면에 혹 그렇다 하더라도 무언가
만들어서라도 믿고 의지하려는 사람도 있으니 과연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그 또한 스스로 애써 절대자를 향한 경외함을 만들어 가지고서라도 인간 된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절제하고 자제하며
살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또한 지혜의 한 모양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가장 그리고 온전히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 만물과 그 완벽한 조화 그리고 정확한 이치로서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경외함으로 고개를 숙이며
이 모든 것을 그렇게 거기에 만들어 놓은 ‘세상의 창조자’가 있음을 알고 믿으며 찾는 사람입니다.
철학은 ‘사물의 이치’에는 깊숙이 접근하여 대단한 성과를 내기도 하는 것으로 기세를 올렸지만 ‘생명의 진리’에 대하여서는
공히 근접하지 못하고 여전한 분분함으로 각각의 날들을 지새우기를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이 무한
발전을 계속 하고는 있지만 그럴수록 또한 지금은 아무도 이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으로 더 선명히 알게 된바 그 ‘저절로’에도 그 저절로의 시작점을 움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아주 심한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인데 쯧, 지금껏 아무도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모든 사람들은 망설이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창조주로 모든 만물을 거기에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나의 생명과 육체도 그 분이 만드셨음을 말이지요. 혹 누군가로부터 억지라거나 맹신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갈피 없는 변증법에 의지하여 논증에 임하려 하지 마십시오. ‘변증법의 달인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여기
있으니’ 바로 믿음으로 모든 논거의 앞선 정답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학문이 다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그렇게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위에 기초하여 서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가 다 악한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고서야 진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상기한 원시인들은 ‘불을 찾아 나서서’ 모든 위험과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진리를 찾기 위한 여정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만 세상에서의 안위를 위한 ‘불’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있음을 믿고 얻으려 갈급해하고
사모하며 찾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값없이 내려주시는 모양이 다릅니다. 그래서 “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요, 찾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세상의 지식이나 머릿속의 계산으로가 아닌 세상의
소리들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우직한 ‘믿음의 기도’의 모습으로 참된 진리의 고지에 도달하는 복 된 이들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역시 또 기도합니다.
- 산골어부 2019525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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