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9-05-07 11:34:19
“걔는 이젠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거야.”
최근에 어떤 이들과의 담소 자리에서 들은 말입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졌다니.. 허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걱정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생계(生計)이며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서의
생존이며 생활입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재산이 많아져서 사는 형편이 넉넉해 졌다는 말이
주 된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배우자’를 잘 만났다 ‘사업이 대박 났다’ ‘복권에 당첨됐다’ 등등에도
해당되어 사용되어지는 말입니다.
쯧,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언제부터 ‘먹고 사는’ 걱정이라는 너나 없는 보편에 매이게 된 것일까..
만일 그러한 질문을 누구에게 받는다면 저와 같은 목회자는 ‘그야 물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 내려올 때부터이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류의 고난과 고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한 결과로서만 먹을 것을 얻으리라’는 인간 삶의 원리와 원칙이 죄 지은 이들에게
세워졌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때부터 인류는 삽질 괭이질로 대변되는 수고와 고생을 감내하여하는
고통을 몸의 달고 살게 된 것이며 바로 그때부터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생겨난 것이지요.
여러 경로로 확인 되고 그래서 더욱 확신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은 사람은 누구든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자신이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하고자 하는 의지의 마음만 있다면 결코 굶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청년 실업자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는 작금의 시절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도 ‘일자리가
없어서’ 라기보다는 ‘일자리를 고르기 때문’ 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힘든 일, 천한 일 등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하여서는 차라리 굶고 지낼지언정 선뜻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 속에 그러한 일들 곧 3D 업종들의 자리는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이 맡게 되었습니다.
주로 빈국(貧國) 곧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서 동남아 일대의 청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의 면면을 잘 살펴보면 그 중에는 무학자(無學者)들도 있지만 대학은 물론 석 박사 학위를 가진
이들도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저도 몇몇 그러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자신이 선택한 ‘외국노동원정’의
이유에 대하여서는 ‘좀 더 나은 수입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나라에서 박사학위를 가지고 교수 일을 하는 것보다도 한국에 와서 노동일을 하는 것이
훨씬 수입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는 일 곧 직업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나쁜 일 범죄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마음만큼은 기쁘게 일을 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하는 모양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족의 먹고 살 일과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서는 못 할 일이 없고 그 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가 알아주고 부러워하는 고학력국가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실업자로 지내는 된
젊은이들 10명 중 7~8명은 대학을 나온 청년들입니다. 반면에 대졸자 아닌 고졸자들은 자신의 몫과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일자리와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하는데 자신들의 고졸 학력에 맞추어진 일자리를 찾아 기꺼이
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졸자들은 그렇게 자기의 대졸 학력에 맞추어진 일자리를 찾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학에서 많은 대졸자들이 양산되는 반면에
그들이 안착할 수 있는 직장과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취직을 하려면 학력을 고졸로 마쳐라’ ‘일을 하려면 기술자가 되어라’ ‘돈을 벌려면 자영업만이
외길이다’라는 등의 탄식과 하소연으로 뭉뚱그려진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인데 그 누구도 아니라고 부정하며
손사래를 치지는 못하는 국면이 우리 모두는 지금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의 선두주자인 저의 경우와 저의 경험 그리고 시선으로 바라 볼 때에 우리나라는
‘학력간판의 시대’를 반세기 넘게 지내왔습니다. 사람은 서울로, 자식은 대학으로 보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았던 시절이 그것입니다. 치열한 학력경쟁이 시작되어 온갖 과외와 학원들이 그래서 생겨났고 ‘대학졸업자’이어야
우대 받던 시절을 지나는 우리 부모님들 즉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여 깊은 한(恨)을 가지게 된 이 분들은 자신의
모든 삶의 모양과 조건들을 기꺼이 양보하고 포기하면서 자식공부에 매어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들도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욕심과 욕망으로 격과 급을 따지게 되어 일류대학 삼류대학으로
이름 붙여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일류대학’ 간판을 따(!)가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급직장을 들어갔으며 부모는 물론 당사자도
자랑스러워하며 어깨에 힘을 주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소가치(稀少價値)가 여전할 때에
그 아래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으로서 이제는 ‘달라진 세상’에 누가 더 빨리 적응을 하느냐 하는 것이 부하고
평안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건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 사회 속의 ‘일류대학타령’들은 여전하고
그 학연의 팽배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있는데 물론, ‘일류대학’이 잘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배척 받아야 할
이유 역시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겠지만, 작금 이 시점에서 ‘나의 일생’을 걸고 돌아보아야 할 것은 무학(無學)
유학(有學)도 아니고 귀천(貴賤)도 물론 아니며 오직 나와 우리 가족이 ‘살아남는’ 일이고 ‘살아가야’ 하는 일인 것이지요.
“체면이 밥 먹여 주냐?”
하는 말이 오래 전에 크게 유행하여서 아이들 사이에서도 킥킥 거리는 중에 사용되고 활용되어졌던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말은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중심을 핵으로 깔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에서 틀리지 않습니다.
에잇 하고 눈을 질끈 감으면서 좀 더 힘주어 말한다면 “죽은 사자 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에서 다름이 아닙니다.
물론 속담 자체의 또 다른 뜻과 의미를 놓고 말하기로 한다면 논쟁과 다툼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기는 합니다만,
나와 내 가족이 ‘먹고 사는 일’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고 또 끄덕여야만 합니다.
물론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는 말에 맥을 같이 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런 일 저런
일을 가리지 말라는 뜻의 함유만을 골라 놓고 본다면 애써 손사래를 칠 일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
누구라도 육체를 가지고 땅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먹고 사는 일’보다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가장 큰 문제이고 그 보다 더 큰 걱정과 근심과 고민으로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이 없지요. 그래서
‘총으로 쏘아 죽이는 전쟁보다 굶겨 죽이는 기근’이 더 무섭다고 말들 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피하거나
도망하거나 숨어있을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지만 기근은 숨을 수도 피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으며
또 그것이 물러가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와 내 가족이 ‘먹고 사는 일’ 앞에서 고학력이나 이전의 지위를 생각하는 ‘체면’을 물리쳐야 하며 또
그 물리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주는 사회적 분위기와 풍토가 마련되고 조성되어야 합니다. TV에서 비추어진
것으로 학력이 대학도 아닌 ‘대학원졸’인 사람이 거리의 청소부가 된 경우였습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육체적
적성테스트 과정을 지나면서 겨우겨우 합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 앞에서나 떳떳한 일이고 가족들 앞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기 까지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력이 동료 또는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숨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모양이 우리 사회의 작금 현실과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모양은 일찍이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을
내가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배울 때에 한 귀로 흘려듣지 아니하고 ‘제대로 배운’
사람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친 이들과 현재 가르치고 있는 이들 역시 먼저 ‘귀천 없는 직업’의 모본을
보인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 떠안고 있는 문제들의 절반 이상의 많은 모양들이 해소되고 해결 될 것입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먹고 사는 일’ 곧 연명(延命)으로서의 ‘생존’ 갈림의 문제이기보다는 ‘생활’의 문제를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밤에 누군가가 굶어 죽었다더라 라는 흉흉한 소문을 어렵잖게 들으면서 자랐고..
전차를 타고 뚝섬유원지에 놀러가서도 누구라도 다 볼 수 있는 저쪽 한 편에 손발이 삐죽이 내밀어 진 채로 엉성한
가마니 한 장으로 덮어 가려져 있던 익사자의 시체를 보면서도 끔찍하기는 할망정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던
시절을 보냈기에 가난에 익숙했고 불합리에 허약했고 비참함에 무표정한 날들을 지냈습니다. 이제는 저도 바뀌고
사회도 바뀌었지만 또한 새롭게 다시 한 번 더 바뀌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바꿔 다 바꿔 처자식 빼놓고 다 바꿔야 살 수 있다.”
일찍이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과 총수 자리 그리고 가문의 바통을 이어받는 자리에서 2세 된 이가 말한 것이라고 하지요.
허허 지금이 바로 그러한 각오와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과거가
화려했던 사람 그래서 마음에 ‘금송아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하며 그래야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알고 스스로의 결심과 결정을 채근하고 종용하여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먹고 사는 길’이 막히는 것 보다는 훨씬 쉬운 길이 아니겠습니까?
작금의 시대에 ‘먹고 사는 길’ 이라고 말한다면 제 나이 쯤 된 사람들은 자칫 ‘호박잎에 꽁보리밥’을 싸먹는 일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초근목피를 벗겨먹는 시대도 시절도 아니므로 ‘나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명제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가?’하는 자기 물음을 내면서 또한 지혜롭고 명쾌한 자신의 모법 답안을
작성하고 그대로 이루어내는 진정한 삶의 가치실현의 멋쟁이들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산골어부 201957 / 출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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