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9-02-15 00:30:52
이곳 강원도 원주시 황둔 마을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영월군 주천면 쪽으로 가다보면 논밭이 양쪽으로 있는
한 한적한 도로 옆에 ‘USA미군용품’이라고 써 붙여 놓은 간판을 두어 개 연속해 보면서 지나가게 됩니다. 이어 해당
가게가 곧 나오는데 여태껏 일부러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차로 지나가며 보니 미군군복들이 몇 개 걸려있고
군용 반합 같은 것들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름 그대로 ‘미군들의 생활용품’들을 판매하는 가게가 분명합니다.
“흠.. 아직도 저런 곳이 있나..”
하고 중얼거리게 되는데.. 휴.. 이제는 벌써 60년 가까이 된 시절 속의 장면들이 무럭무럭 피어올랐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중반 무렵.. 제가 초등학교 때에는 물론 중학생이 되었을 적에도 우리나라 시장이며 차도 변에는 물론
골목에서도 미군용품들을 파는 곳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주로 상하 군복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군용접이식 삽,
야전 식사 때 사용하는 반합 그리고 담요와 슬리핑백 또 군화 그리고 전투식량 C레션과 식판 그리고 숟가락과 포크도
있었지요. 그래요.. 진정한 ‘부대찌개’의 오리지널 맛과 모양이 그 즈음에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어떻게 우리 집에도 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저 역시 어릴 적부터 중학생 때까지 US 마크가 크게 찍힌 미군용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또 초등학생 때에는 교회에서 나누어준 구제품 겨울 오버를 입고 다녔는데 그 역시 미제였으며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우유덩어리를 모자에 받아 집에 가지고 와서 끓여 먹기도 했던 바 그 또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어른들은 말하곤 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전투복이라고 하였던 미군 바지에 검정 물감을 들여서 입는 것이 ‘없는
중에도 겉멋이 든’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여서 저 역시 여러 날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다니며 조른 끝에
하나 장만하여 입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온통 ‘미국말’로 쓰여 있는 작고 짙은 국방색 우유가루 커피가루 포장봉투들을 2원 3원에 팔기고 하였고
고기가 들어있는 국방색 깡통들을 10원 15원에 팔기도 했습니다. 좀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은 국산 백두산연필 대신
노란색에 분홍색 고무가 달려있는 연필을 쓰면서 ‘이건 미제’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미제가 있었는데 바로 한 쪽 구석에 놓여 있던 쌀통입니다. 통상 ‘미제통’이라고 하였는데 원래 뭘 담았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두껍고 탄탄한 황갈색 박스 종이로 만들고 모서리에 쪽으로는 철 띠를 둘렀던 것이었고 엄마는 그것이 미군들이
쓰던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영어로 뭐라고 써 있었는 데 다른 것은 몰라도 USA 글자 만큼은 ‘미제’라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여름날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골목 그늘에 내다 놓고 앉아서 평상처럼 쉬던 것들 중에서도 조립식 미군 야전침대가
가장 많았으며 동네 아주머니들 역시 미군용 야전전선인 BB선으로 엮어 만든 장바구니를 들고 다녔고.. 혹 야외에 나가서
취사를 할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등장했던 것이 미군용 휘발유 버너였습니다. 초등학교 교실 중에도 미군들이 지어 준
둥근 군용 콘세트 막사로 된 것이 있었는데 ‘고맙게도’ 미군들이 와서 지어 준 것이라고 교장선생님은 월요일 조회 시간에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회가 끝나면 꼭 미군 군악대가 연주했다는 ‘쌍두의 독수리’ 행진곡이 나왔고
거기에 발맞추어 콘세트 막사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저도 그 ‘막사교실’에서 초등학교 1~2학년 동안을 국어 산수 사회생활을 배웠으니.. 또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붙잡아 세워 놓고 DDT를 머리며 앞가슴 겨드랑이 섶까지 뿌려주던 이들 중에는 어른들이 말하던 ‘코쟁이’ 사람들이 있었고..
쯧, 그래요 지금 생각하면 불쌍하고 안쓰러워 눈물 나는 장면들이었기는 하지만 아무튼 우리 생활 속의 한 몫을 담당했던
미군군수 물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듯 60년대 나라살림이 형편없이 어려웠을 적뿐만 아니라 이제는 새마을 운동 분위기 같은 것을 등에 업고
조금씩 펴가던 시절이었던 70년대 중 후반까지도 역시 미군용품들에 대한 활용과 애호가 계속 되었던 바 청년이 되어
입영통지를 받고 자꾸만 추워지던 1976년 10월 18일 왕십리역을 출발하여 논산훈련소 28연대에 입소를 하고보니 적어도
하사 이상 되는 이들 중사 상사들은 물론 장교들은 물론 먼발치서 볼 수 있었던 장군들도 미군용 야전잠바에 별을
달은 것을 입고 있었습니다. 물론 국산도 있었지만 거의 일반 병의 몫으로만 사용되어졌는데 품질도 현저히 떨어졌고..
총 쏘는 훈련도 M1 과 칼빈 소총으로 받았으며 자대에 가서도 개인관물로 받은 탄띠 수통 철모 등 역시 낡은 것들이 많았고
또 US라고 찍힌 물건들이 많았었는데 그 중에는 그 년도가 ‘1944’이라고 찍혀있는 것도 있었으니 2차 대전 때 쓰던 군수물자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지요.. 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에도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때 이 물자의
임자였던 군인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별 생각을 다 해 보곤 하다가 ‘삐리리익’ 보초 집합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는
개인 화기 M16 소총을 들고 뛰어나가곤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 무거운 M1 이 아니고 들고 다닐 만한 무게의
M16 자동소총이니 말이지요.. 그 모든 장면들이 어느덧 44년 도 더 전의 일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군용품’이라는 ‘햇볕과 그늘’ 속에서 생활을 한 산 증인이 바로 저이고 보니 물론 그 이전 선배 어르신들은
더욱 고생들을 하셨습니다만 휴 지금은 그야말로 얼마나 ‘눈부신’ 발전과 경제성장을 하였습니까 그러한 지금 비록
강원도 시골 산골 마을 이기는 합니다만 2019년 21세기 작금의 시대에 ‘USA미군용품’을 파는 상점이라니..? 갑자기
한 번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혹시 ‘공갈 반도’ 허리띠도 있으려나.. 허허 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그렇듯 미군들의 물자를 가지고 너도 나도 사용하며 살았던 적이 있었고 아직도 나이 70살이 되기 전의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서 과연 크게 오래지는 않은 세월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세상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같은 곳을 가보면 ‘군인물건’들을 전문으로 파는 곳이 있어서 혹 개인이 분실한
군수 물자 같은 것은 거기에서 사가지고 보충을 하곤 하였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있는지.. 그때 들은 말로는 군용 지프차도
잃어버렸으면 여기에 오면 해결 된다고 하였는데.. 대당 200만원 이라고 하였던가.. 소총은 30만원이고.. 당시 서울 변두리
한 50평 땅 위에 지어진 집들이 20만 원 쯤 하던 시대였는데 뭐.. 다 돌아다니던 말들이었겠지만...
성능 좋은 정밀기계는 일제, 튼튼한 물건은 미제 그 두 가지를 합해 놓은 것은 독일제.. 라는 말들을 공식처럼 하였던
시절이었는데 과연 실제로도 그랬고.. 그래서 70~80년도 까지도 당시에 미국 영화들을 보면 서양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카메라는 거의 모두가 Sony 혹은 Nikon 이었는데 과연 성능들이 좋아서 그 방면에 세계시장을 석권하였습니다. 그런데
‘튼튼한’ 것은 미제 쪽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지금도 TV에서 ‘정글의 법칙’이나 ‘1박2일’ 프로 같은 것을 보면 여전히
그 미제 반합이 끓이고 익히는 조리 용구와 밥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말이지요. 허허. 혹 진짜 미제는
아니고 이제는 국산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미군 반합 모양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니..
쯧, 그래 튼튼하고 편리한 것이었으니까 60년대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리면서 “밥 좀 줘” 하던 거지들이 한 결 같이
그것을 들고 다녔던 것이겠지.. 그래서 당시의 어른들은 물론 나 같이 어렸던 아이들도 그 반합을 볼 때면 ‘거지깡통’이라고
하였는데.. 벌써 오래 전 종로 거리 YMCA 근처였던가..를 지날 때 한 남루한 옷의 불구자가 거리에 앉아 어린 딸인 듯 한
아이를 끌어안고 지나는 이들에게 연신 절을 하며 구걸을 하였었는데 그때 앞에 놓인 구걸통 역시 그 미제 반합이었지요..
저도 거기에 동전 한 개를 넣었는데 딸랑 소리가 너무 커서 마음이 찡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동전이 별로 없다는 증거이었으니까..
그래서.. ‘미군용품’이라는 글자를 보거나 말을 들으면 ‘그때 그 시절’ 속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특히 당대의 어른들에게는 더욱 힘들고 어렵고 고단했던 시절이었겠지만 그러나 나 같은 어린 아이들은 그저 콧물을
휘날리며 히히거렸고 청계천 물속에서 혹은 주변에서 당시 아이들 말처럼 ‘재수가 좋아서’ 그럴 듯한 고철이라도 한 가닥
주은 날에는 우르르 엿장수 한 테 몰려가서 10원 20원을 받으며 좋아라 했고 아니면 철커덕철커덕 가위로 끊어준
엿가락을 길게 물고서 우리 동네 어귀로 들어 올 때는 아무 것도 부러운 것도 부족한 것도 없었는데.. 지금 그 시절
제 나이 쯤 된 아이들이 햄버거와 피자를 먹으면서도 불평이 많고 투정부림도 많은 것을 보면서 쯧쯧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 없어봐야 귀한 줄도 알겠지만 이제 뭐 60년대로 돌아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그런 줄이라도 알고 그 시대와 그 시절을 너희들 만한 나이로 살았던 지금의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는 훈련을
좀 해보려무나.. 유익할 것이다. 라는 그러나 역시 ‘꼰대의 꼰대다운 말’을 할 수 밖에 없으니.. 참 아이들도 지겨울 것이겠지만
저 또한 답답하군요. 그래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통하여 통용되는 정도(正道) 정직하게 바른 길을 걸으면서 살아가라고만
말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수준이겠습니다. 그래, 젊은이들이여 오래 전 ‘미군용품’을 가장 좋은 것으로 알고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의 말이니 잘 새겨만 듣는다면 분명 삶의 유익을 얻게 될 걸세.. 그 시절을 함께 살았던 이들이여.. 모두 늘 건강하시기를...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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