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것들에게
- 주 용 일 -
세상에는 불리고 싶어
날치처럼 뛰어오르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은자처럼 풀숲에 제 이름 묻고 사는 것들도 있다
산에서 길 잃어 계곡을 헤매다
풀꽃이라면 자신만만하던 내게
난생처음인 풀꽃이 나타났다
이파리며 꽃잎 암술 수술의 생김새까지
꼼꼼 살폈다가 집에 돌아와 그림을 그려놓고
식물도감을 뒤져도 그 놈이 없다
산 속에만 있고 책 속에는 없는
어쩌면 미기록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붙여줄까 하다가
아니, 그 풀꽃은 그냥 이름을 얻지 말았으면 싶었다
우리 산하에 이름이 없거나
세상을 외면하고 사는 이름 없는 풀꽃이
몇 포기 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름이란 존재를 붙들어 매는 올가미이기도 하며
또 세상에 알려져 생사여탈권이 되기도 하거니
뛰어오르거나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돌 틈에 제 이름을 묻고 살아가는
저 풀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가
다행히 이 땅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것들은
이름 대신 순한 햇살에 빛나는 꽃을 얻는 법이다
- 주용일 “꽃과 함께 식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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