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홍 / 노향림
노인 요양소
칠 벗겨진 담장 아래
생의 빈자리를 찾아 여인들이
해바라기하며 앉아 있다.
붉은 것들만이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거짓말처럼 붉은 그림자들을 제 몸 속에서
꺼내어 깔고 앉아 있다.
가물가물한 마음의 기억 속에
숙인 목덜미와 파인 가슴 속에
비밀한 사랑 몇장을 지갑처럼 숨겨넣고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그 소리 부드럽게 받아먹다가
벌레 먹은 고사목이 함께 놀고 싶다고
흩어진 옷매무새를 추켜올리는 사이
영산홍이 하루해가 길고 지루했다는 듯
다 저녁에 싱싱해진다.
사연 깊은 여인 같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이승의 한컷이여
- 노향림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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