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고인에 대한 예의라면..

덕 산 2019. 8. 19. 11:57

 

 

 

 

 

 

 

 

김홍우(khw***) 2019-08-17 04:37:32

 

이미 세상에 없는 친구를 말할 때에는 안 좋은 말은 하지 말자..”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서 더 그렇겠지요. 어디에서든지 좌담 중에 고인 즉 우리보다 앞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대부분 그 사람의 좋은 이야기쪽으로만 하곤 합니다. 그것이 곧 고인 된 이에 대한

()를 갖추는 것이라고 배운 까닭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엊그제 우르르 오랜만에 저의 부랄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먼저 세상을 뜬 친구의 이야기가

화제로 나오자 한 친구가 적당히 선을 긋는 모양으로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워낙 오래 된 친구들이다보니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어울린 친구도 있고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거나 최소한 중학교 때부터 친구가 된

사이이다 보니 그 세월이 5060년이 족히 되는지라 서로에 대하여서는 알아도 너무 잘 아는 그야말로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친구사이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마냥 편할 것도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소의 불편 비슷한 것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서로에 대하여서

속속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나이 쯤 되어가면서는 적당히 뭉개지거나 잊어져야 하는 것들도 없지 않아

있건만 이런 부랄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난날의 장면들이 속절없이 까발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나중에는 허허 같이 웃게 되고야 마니 역시 철없던시절의 이야기 속의 철없던 모양들은 언제나

무죄인 것 같습니다. 허허.

 

 

이야기 속에 고인된 친구는 벌써 몇 해 전에 나이 60세로 세상을 마름한 친구입니다. 쯧 요즘 시각으로 볼 때에

너무 빨리 그야말로 한 창 젊은이 때에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걔는 결국 자기 건강관리를 잘 못해서 먼저

죽은 거잖아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친구사이 이었기에 무슨 나무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는 합니다만,

이제 그렇게 나무란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 친구는 지금 우리 곁에 없기 때문에

무엇 하나 자기 말로 거들거나 가로 막을 수도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친한 친구였던 고인을 둔 이들이

흔히 하는 말들처럼 죽은 자식만 억울한 거지 뭐에 기어코 머무르는 이름이 됩니다.

 

 

우리들처럼 그저 골목 친구, 동네 친구에 머물렀다가 고인 된 이름들은 그래도 나은 편인 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 이름들을 유명 간판처럼 내 걸었던 이들 중에 고인 된 이들의 이름들이 가끔 씩 또는 때마다

또 사회 이슈가 생길 적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방송매체나 요즈음은 인터넷 중에 이름들이 올려지는 경우들을

보게 되는데 그 대부분이 좋은 일과 연관되거나 존경의 이름혹은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의 이름보다는 책임전가와

추궁의 모양 같은 비난과 비판의 이름들로 거의 대부분 항상 떠 올려 진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작금의 사회 정치

상황과 맞물려서 자꾸만 더 반복 회자 될 수밖에 없는 근 현대사 속 인물들의 이름들이 그러하지요. 그래서 어떤 때에는

, 사람은 죽으면 다 미운 이름들을 갖게 되는 것인가..’하는 누구에게 인지도 모를 의구의 물음도 내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렇듯 고인에 대한 차단의 벽분위기가 앞서 사신 분들에 대한 존숭의 마음을 가진 이들에 의해서

암암리 모양으로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아무튼 그 분들은 우리 보다 앞서 가신 분들이고 생전에 잘했던 못했던

이제는 후대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대화의 밥상이나 비판의 상차림에도 작은 숟가락 하나라도 얹으며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기에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들에 대한 적절한 대접과 대우로서의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이가 그렇듯 고인으로 돌아갔을 때 혹자는 그래서 더욱 마음 놓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더욱 조심하며

고인의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을 보게 되지요. 우리 모두는 고인이 되어보지 못한 만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아무래도 고인 된 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이름이 후자의 경우에서 더욱 회자되기를 원하고 선호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 , 그래서 우리 후대를 이어가는 이들이 받아야 하는 교훈으로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을

늘 생각하면서 후손들에 의해서 평가될 나의 이름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데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흔히 죽으면 다 끝 난거지 뭘..”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 죽어보지 않았다면 내가 모르는 사안에 대하여서는

그저 입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죽은 이의 이름과 살아있는 나의 이름과 또 필히 죽을 나의 이름을 보듬고 지켜내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의 모양으로 나누이게 되는데 한 무리는 죽은 뒤에는 천국과 지옥으로의 갈림에 서게 된다는 것이며 또한

무리는 죽으면 그저 땅속에 들어가서 썩어버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당신이라는 존재가 무()가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여전한 유()의 선상에서 계속되기를 원합니까..

 

 

비록 사람은 누구나 다 죽고죽은 뒤의 일을 알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아주 이 나버리는

모양 보다는 뭔가 어떤 형태로이든 계속이어지기를 막연하게나마 바라게 되지요. 그래서 영원회귀같은 사상도 나오게

된 것이고 거기에 심취하고 또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율배반이 또 거기에서도 발견 되는 바

사람의 육신이 열심히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있을 때에는 정신이나 영혼이나 심령 또는 영생 그리고 천국과 지옥 같은

것에 별로 크게 신경을 쓰거나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육신의 부귀영화에만 집중을 하다가 이제 그 육체가 다 쇠하여 머리털

다 빠지고 기름기 다 빠져버려서 쭈글쭈글한 가죽의 모양들이 내 몸의 정한 시간이 다 되어감을 알려올 즈음에서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내 영혼의 갈림과 향방에 대하여서 돌아보며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독교인 된 사람과 또 불교 유교 등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물론이고 또는 종교의 모양만을 가진 주술적 우상숭배와

그 섬김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혼불멸을 믿습니다. 그래서 피라미드와 미이라 같은 것도

생겨난 것이지요. 바로 절대불멸 영생불사의 신을 믿으며 거기에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또 나의 영혼도 의탁하게 됩니다.

특히 영혼의 일에 대하여서는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기에

오직 그렇게 믿는사람곧 신자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믿음은 과학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며 그 사람의 일생을

이끌게 됩니다. 기꺼이 목숨을 내놓기도 하는 경우는 종교적 신념에서의 예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는 것이면서도 이 지구상의 인구 수십억 대부분의 신앙의

삶을 이끌고 있는 신()에 대하여서는 그래서 쉽게 넘어갈 수도 넘겨 버릴 수도 없는 인생의 금생과 내생의 모습을

가늠하고 갈림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절대 명제가 된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보다는 초상집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하였지요.

잔치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의 자리이지만 초상집에서는 나도 꼭 저렇게 숨을 멈추고 눕고야 만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기 때문이며 아무리 거부를 하여도 그렇게 같은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일생 여정입니다.

 

 

그렇듯 꼭 닥쳐올 그때를 생각하며 나름 혜안으로 일깨워진 사람들은 뭔가 준비를 하게 되는데 사실 보통 사람들이

여기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준비외에는 아무 것도 없지요. 다만 여기에서도 나의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과 흙으로의 소멸로만 아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선명히 나누이게 됩니다. 그래서 전자는 앞서 죽은 자와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며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추게 됩니다. 지금은 서로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불원간에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 확신 곧 그렇게 믿는 믿음 때문이지요.

 

사실은 세상 거의 모든 이들이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종교 의식과 예식을 가지고 장례를 치릅니다. 곧 죽은 이들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으로서 이름 그대로 장례(葬禮)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장례를 치르기는 하여도 또 자신의 장례도 불원간에

그렇게 치르게 될 것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치 자신은 그러한 것들과는 영영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모양들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의 모양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인의 사람들은 모두 잠시

잠깐을 살아가면서도 살아있을 때만큼은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한 말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서

만큼은 애써 망각의 삶의 모양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날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몰라, 내일 일지 오늘이 될지..’하는 전전긍긍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늘 죽어 있는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만큼은 살아있는 나에게 집중을 하여야 하고

죽음의 어두운 그늘에억눌려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또한 죽음이란 나에게 꼭 찾아오는 현실이기 때문에 아주 잊거나

저기 어딘가에 멀리 놓아두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앞서 간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현재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상기한 저의 부랄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아닌 듯 들려오는 것은 언젠가 다시 만날

친구라는 미세한 소리입니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9816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절했던 초심을 잃지 않기를   (0) 2019.08.23
무언가를 잃는다고 해도   (0) 2019.08.20
무엇이 공익을 위하는 것인지   (0) 2019.08.14
작금의 잡는다는 말  (0) 2019.08.13
차가운 것 뜨거운 것  (0) 2019.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