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범(far***) 2015.06.28 06:01:20
신경숙 표절 스캔들을 취급하는 언론의 보도 경향은 대체로 냉정하고 비판적이다.
Anti-신경숙의 느낌도 준다. 신문기사의 댓글도 대체로 그렇다. 백만을 넘어
이백만 부나 팔렸다는 그 독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왜 세상은 갑자기
촉망 받던 중견 소설가 신경숙에게 등을 돌린 것인가. 중견 소설가인 신경숙은 그들
문학인들이 작품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이 여기는 등단(?) 이래 30년 간
대체로 호평을 받았던 것인데, 그가 어제 인터뷰에서 술회한 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인가? 호사다마란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은
말이 아닐까 하고 그 자신 정신이 황망한 상태에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론이 Anti- 신경숙으로 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당사자는; "나는 원래 심약한 사람이고 두려움도 많다."고 상황을 피하려는 심리의
일단을 비쳤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떨치고 중견 소설가다운 지성으로
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해 봐야 할 줄 안다.
신경숙은 이렇게 변명 한다.
"나 자신 나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 논란이 된 작품을 읽어보니 표절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맞다. 20대 초반에 등단해서부터 나의 책을 읽어준 독자들께 미안하다."
자신의 기억력에 책임을 전가하는 이 발언이 또 기자들과 대중의 빈축을 샀다.
요즘 정치인들을 비아냥거릴 때 쓰이는 관용어로 자리 잡은 '유체이탈'식 발언 이라는 것이다.
유체이탈이라는 말은 모순된 언행에 대한 적나라한 지적이다. 인체와 정신은 결코
별개일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인체의 신경가닥이 뇌를 지배할 것이고 이것이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체이탈 식 화법은 그 인격을 의심케 하는 언행이다.
그래서 그런지 표리부동한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언행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타자기 세대인 나는 컴퓨터를 잘 모르지만, 컴퓨터로 비유하면 기억력은
메모리 반도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시스템 반도체가 명령해서 메모리에 저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메모리 반도체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살리고 할 일은 없다. 요컨대 중앙처리장치인
시스템 반도체와 운영체제 프로그램의 명령대로 저장하고 풀어 놓고 할 뿐이다.
그러니 표절 시비가 된 문장을 기억력의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언젠가 유명 포털사이트에 명사의 서재 코너에 ' 작가 신경숙의 서재' 사진이 실렸다.
일층과 이층을 통으로 기하학 적인 구조로 만들어 놓은 서가에는 어림짐작으로도
5천 권 이상은 되어 보이는 각양각색의 서적이 진열되어 있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명색이 소설가라면 저 정도의 책은 쌓아 두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신경숙은 도대체 왜
그 많은 서적을 웬만한 주택의 거실처럼 널찍한 서재에 진열해 놓았을까?
혹자는 책을 진열해 놓는 행위를 지적 허영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 평범한 생활인의 경우는 노상 독서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활에 지쳐 마음이 심난 하면 활자가 머리에 박히지도 않는다. 책을 노상 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책장을 쳐다보면서 책 제목을 일별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행위가 된다.
무위한 시간의 낭비가 아닌 것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보며 기억을 되살려 그 내용을 반추해 본다.
책 내용을 기억에 의존하여 더듬어 보다가 막히는 부분에 가서 책을 꺼내 확인도 해 본다.
읽다가 중단한 책이나 읽어보지 않은 책은 따로 구분해 놓고 늘상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시간이 되면 읽을 수도 있다. 요컨대 눈에 보여야 책으로서의 효용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책은 단지 폐지에 불과하다.
늘 상 대박 출판을 꿈꾸는 한국의 출판사들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소설가 A가 얼마 전에
작고한 친모(親母)의 죽음을 모티브로 하여 단편소설을 하나 쓰고자 하였다.
구상 단계에서 궁리 하다가 적절한 문장과 구상이 떠올라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 하였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제 일 수도 있다. 요양병원에서 온 전보를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전보용지에는 단지 이렇게 쓰여 있었다.
"ㅇㅇㅇ 귀하, 모친 사망. 장례식은 내일로 정 했음. -ㅇㅇ요양병원 拜-"
전보 내용으로는 오늘인지 어제인지 돌아가신 날을 알 수 없었다.
요양병원은 서울에서 백 킬로미터 정도 상거한 지방도시 읍 소재지에 있다.
서두르면 오후 두시에 시외버스를 타고 네 다섯 시 정도면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샘을 하고 내일 장례를 치르고 나서 다시 귀경할 수 있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강 일정을 정하고 부서장 방으로 가 모친상을 당하여
이틀간 연가를 내겠다고 말 했다. 부서장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못마땅한 심사를 표출 하는 것이었다."
소설가는 여기까지 마구 자판을 두드린 후에 의자에 등을 대고 담배를 피워 물고는 찬찬히 읽어 보았다.
서술한데로 이미지를 떠올리니 썩 괜찮은 그림이 그려졌다. 어쩐지 글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 하였다. 무슨 문학상이 눈에 아른 거렸다. 그 즈음에 '김ㅇ'이라는
중진 작가가 '화장'이라는 중단편으로 권위 있는 상도 받고 영화 판권도 팔아먹어
일석이조를 얻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발전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 하였다.
소설의 모티브만 생각 했지 정작 주제를 정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 하다가 자기 감상에 취해서 얼핏 떠오르는
모티브로 서술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써 놓은 도입부를 두 번 세 번
읽어보니 어쩐지 서술이 기억에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다시 피워 물고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A는 서술 내용이 생소하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자신이 써 놓은 도입부를 눈으로 보며 생각을 더듬어
가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급히 담배를 비벼 끄고 눈을 들어 책장을 더듬어 보니
까뮈의 '이방인'이 눈에 띄었다. 아차! 세상으로부터 망신당할 뻔하지 않았나?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개망신이라더니...."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방인의 도입부의 상황 설정을 한국 실정에 맞게 바꾸었을 뿐이었다.
소설가 A는 한때 소설 '이방인'에 심취하여 그 소설을 하도 자주 읽은 바람에 첫머리를
외울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다. 소설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모니터의 문장을 모두선택하여
한방에 지우고 말았다. 그리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보통의 경우이다. 모방 혹은 표절의 의혹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학계는 '등단'이라는 이상한 제도가 있어 운이 좋으면 스무 살 남짓 약관의 나이에
공인된 시인도 되고 소설가도 되고 평론가도 될 수 있다. 본인의 고백으로 신경숙도 나이
22살 약관의 나이에 등단하여 문학계로부터 인정받는 공식적인 문학 작가, 즉 소설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른바 문단이라는 조직에서 공식적인 작가로 인정하면 대중은 무조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일 대중의 입장에서 그들이 정한 이 제도가 합당치 않다고 느낀다.
물론 약관의 나이에 천재적인 문학 재능을 보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스또예프스키도 20대 중반 무렵에 '가난한 사람들'이 출판사에 채택 되어 문학계에서
호평을 받는 바람에 정식 작가가 되기는 하였다. 그런데 20대 나이라고 아무나
도스또예프스키의 지성과 지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때 그는 이미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책을 읽고 번역까지 해 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까뮈'의 소설 '이방인'은 출판 된지 75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프랑스에서는 문고본으로는 늘 베스트셀러로 알려져 있다.
까뮈가 '이방인'을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한 때가 28살 무렵인 1941년도이다.
이듬해 같이 저술한 철학 에쎄이집 '시지프스의 신화'와 함께 출간 하여 전후 최대의
문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번역 출판 되었다. 까뮈의 나이 29살 때 일이다.
그러면 까뮈는 그전까지 문학 지망생으로 기성 작가들 작품을 필사나 하고
습작이나 하면서 보냈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대중은 잘 알고 있다.
이방인과 시지프스 이전에 그는 이미 두 권의 철학 에쎄이 집을 통하여 발간하였다.
22살 때 철학 학사 자격을 얻은 후에 시작된 다양한 정치활동과 연극 활동 이 있었고
학업과 병행하여 많은 노동 직업을 전전하며 세상의 풍파를 겪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대학시절의 은사 '장 그레니에'선생이 있었다. 장 그레니에는 그저
문필가로서의 자질이 보이니 장차 글이나 써 보는 것이 어떠냐는 식의 막연한
충고를 하는 한국의 교사들 하고는 달랐다. 까뮈가 철학적 문필가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지성과 지식을 가꾸는데 장 그레니에 선생은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 졌다.
장 그레니에 자신이 뛰어난 철학 교수였다. 까뮈는 21살에 결혼 하여 28살에 이혼 하고
그 해 다시 피아니스트 이자 수학(數學)자인 프랑신과 재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나이 서른 남짓에 많은 세상 풍파를 겪었다. 세상을 알 만큼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당연히 체계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스승이 있어야 할 일이다.
저술을 직업으로 해야 하는 문필가들에게는 더욱 더 스승의 존재가 중요할 일이다.
"너 글 재주가 보이는데 소설이나 써 보지 그러냐?" 이렇게 단순히 아니면 말고 식의 지나가는
말로 충고 한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스승이 될 것인가?
한국이 건국하기 전에 일본어로 공부한 해방 1세대에게는 방대한 서구의 문헌을
번역해 놓은 일본어 문헌으로 깊이 공부한 일본인 스승들이 있었다.
이들과 일본인 스승들에게 배운 1세대의 제자들이 해방 2세대로 해방 이후
한글세대를 가르쳤다. 그러나 건국 역사가 일천 한대로 대학교의 학문적 축적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시나브로 스승들의 실력은 떨어지거나 대충
개념만 아는 얼치기 지식인들이 스승노릇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건국 혼란기에 학적 조회나 실력 검증을 할 겨를도 없이 대학교의
구색 갖추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정한 이치가 아닌가.
일설에 따르면 한국의 출판계까지 포함된 문학계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도 몇 차례 수상 했으니 경쟁 심리가 생겼던 모양이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너무도 한심해 보인다. 설사 한 명의 뛰어난
작가가 있어 노벨상을 받는다한들 이 나라 문학 전반이 성숙해 질 근거는 무엇인가?
구어체의 감각적인 소설 제목 '엄마를 부탁해'가 영문 번역 출판되어 외국에 팔렸다고 해서
신경숙과 그 소설의 문학성이 세계적으로 인정이라도 받았던 것인가?
그렇게 생각 했다면 고도의 지성이 기본이 돼야 할 이 나라 문학계는 실망스러운 집단일 수밖에 없다.
문학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작가의 이력이 중요할 줄 안다.
그 문학의 바탕과 배경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서재 책상머리에서 상상에 의존하거나
이것저것 책을 참고하여 서술하는 글에서 진정한 문학성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를 사변적(思辯的)문학이라 본다. 그것대로 문학일 수 있지만
폭 넓은 공감을 얻기에는 미흡하다.
까뮈의 '이방인'이 나오기까지는 저자의 근 십년에 가까운 세월동안의 철학적 사유와 연구가 있었다.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철학 에쎄이 집이 '이방인'과 동시에 저술 되고 출간 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이 저술되기까지는 수년에 걸친 말로의 중국 방문과 내전의 현장 참여가 있었다.
조지 오웰의 일련의 명저가 출간되기 위하여 오웰의 스페인 내전의 참여와 파리 런던에서의
노숙자 생활 그리고 오랜 세월 저널리스트로서 세계를 지켜 본 이력이 있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 저술 되는 배경에는 4년의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이 있었다.
솔제니친의 문학을 완성하기 위한 배경에는 근 10년에 걸친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과
암 병동의 경험이 있었다. 헤밍웨이의 불멸의 작품 '노인과 바다' 나오기 위해서는 광적인
헤밍웨이의 바다낚시 경험이 있었다. 문학의 리얼리티가 반드시 체험적 수기문학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체험을 문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은 문학 작가들의 역량이다.
결코 평범한 대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도의 지성적 예술 행위다.
책상머리에서 아무리 머리를 짜 내 봐야 문학의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일 수밖에 없다.
'미시마 유끼오'는 우익 지식인답게 역동적이고 신체 건장한 사내로서 현실에서 겪은
다양한 생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여성 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소설 '우국'의
리얼리티를 살렸을 것이다. 30대 초반의 조신한 미혼 여성 이었던 신경숙은 '전설'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신혼부부의 육욕을 묘사 하는데 책상머리에서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 자명 하다.
남성 편력이 없이 뭘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밖으로 돌면서 남자들을 만나고
도깨비 연애를 하면서 겪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겪어보지 않고는 남녀 간의
육욕의 희열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몸이 기쁨을 알았다"는 문장은 인지능력이 없는
몸 자체가 희노애락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성립이 안 되는 문장이다.
아마 일본식 문장인 모양이지만 한국어로서 그런 식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신경숙의 일련의 작품 중에서 그래도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작품들임을 그 자신이 알아야 한다.
문학은 책상머리에서 필사를 통하여 기본을 다지고 습작을 한다고 해서 완성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필사(筆寫)라는 습작행위에 거부감이 든다. 그것이 도대체 뭣 하는 짓인가?
문학은 자신의 사유에 문학성을 입혀 활자화 하는 고도의 예술행위이다.
당연히 습작행위도 자신의 사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문예창작 공부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고 해도 자신의 문학을 완성하기 위해서 해야 할
공부가 소설 작법이니 창작기법이니 하는 따위는 아닐 것이다. 요령을 익혀서 문학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소설 창작 개론서를 독파하고 남의 작품을 필사나 하면서 문학의
토대를 마련 한다는 것은 모래성을 짓는 일이나 다름 없다.
무엇보다 작금의 신경숙 스캔들에 비극이 있다면 필사(베껴쓰기)의 비극이다.
그 짓이 문학공부가 된다는 말인가. 그 길고 지루한 인내의 시간에 폭 넓은 독서를 해야 할 일이다.
세상에는 일평생 읽어도 죽 떠먹은 자리일 정도로 동서고금의 읽어야 할 책이 너무도 많이 있다.
무엇보다 문학인들은 골방 책상머리에 앉아 맨 바닥에서 수영 흉내 내듯이 알량한
자신의 사유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문장이나 미문으로 다듬기 보다는 골방을 뛰쳐나가
세상에 몸을 담궈야 한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하게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
쓰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문학인이 자신의 기억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일은
이 사회를 슬프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 이 나라 문학을 한 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다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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