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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속에서 / 이기철

덕 산 2024. 12. 5. 06:09

 

 

 

 

세월 속에서 / 이기철

누가 빼앗아 간 것도 아닌데 세월만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

흰 옷, 닳은 구두, 헝클어진 머리칼

이 범연한 이력을 지금 와 어찌 다시 고쳐 슬 것인가

돌아보니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온 삶

나는 문득, 초등학교 교원이 되어 내 생애 첫 이력서를 쓰던 서른 해 전의 떨리던 손가락과

뚜깔잎 같이 두근거리며 쓰던 초회 추천작과

내시경으로 위를 검진하며 쓰던 학위논문의 시절을 지나

반딧불 같은 추억 하나하나에 이름 불러주며

그 추억 속으로 헌 신발을 신고

산그늘처럼 더디게 걸어왔다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이름들이여

헌옷이여, 버린 칫솔이여, 찢은 종이여

바람은 언제나 내 홑옷 윗저고리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가지만

나는 결코 슬퍼하거나 서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삶의 절반은 눈물이거나 비탄이라고 써서는 안된다고

어둔 밤에는 별이 뜨고 슬픈 마음 위에도 아침놀이 비친다고

아이 달래듯 쓰면서 왔다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 그때 쓰던 일기 쪽지와 그때 쓰던 편지구절은 지금 다 잊혀졌지만

강물 바람꽃 아기사슴 별똥별

풍금소리 황혼길 하이네의 시 구절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가슴 속에 지닌 찔레꽃 같은 그리움 하나라고

그때 썼던 내 볼펜은 진실이었다고

나는 지금 와이셔츠를 갈아입으면서도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못 버리고 간직한 것들

형체도 없어 내 몸 속에 들어와 나를 끓게 하는 술과

아직도 때로 열병처럼 도지는, 나를 요동치게 하는 기다림과

꺼진 줄 알았는데 다시 피어오르는 잉걸불 같은 그리움과

물소리와 상수리 잎 지는 소리와 새벽 달빛과

치차(齒車)같이 덜컹거리는 못난 추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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