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속에서 / 이기철
누가 빼앗아 간 것도 아닌데 세월만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
흰 옷, 닳은 구두, 헝클어진 머리칼
이 범연한 이력을 지금 와 어찌 다시 고쳐 슬 것인가
돌아보니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온 삶
나는 문득, 초등학교 교원이 되어 내 생애 첫 이력서를 쓰던 서른 해 전의 떨리던 손가락과
뚜깔잎 같이 두근거리며 쓰던 초회 추천작과
내시경으로 위를 검진하며 쓰던 학위논문의 시절을 지나
반딧불 같은 추억 하나하나에 이름 불러주며
그 추억 속으로 헌 신발을 신고
산그늘처럼 더디게 걸어왔다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이름들이여
헌옷이여, 버린 칫솔이여, 찢은 종이여
바람은 언제나 내 홑옷 윗저고리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가지만
나는 결코 슬퍼하거나 서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삶의 절반은 눈물이거나 비탄이라고 써서는 안된다고
어둔 밤에는 별이 뜨고 슬픈 마음 위에도 아침놀이 비친다고
아이 달래듯 쓰면서 왔다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 그때 쓰던 일기 쪽지와 그때 쓰던 편지구절은 지금 다 잊혀졌지만
강물 바람꽃 아기사슴 별똥별
풍금소리 황혼길 하이네의 시 구절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가슴 속에 지닌 찔레꽃 같은 그리움 하나라고
그때 썼던 내 볼펜은 진실이었다고
나는 지금 와이셔츠를 갈아입으면서도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못 버리고 간직한 것들
형체도 없어 내 몸 속에 들어와 나를 끓게 하는 술과
아직도 때로 열병처럼 도지는, 나를 요동치게 하는 기다림과
꺼진 줄 알았는데 다시 피어오르는 잉걸불 같은 그리움과
물소리와 상수리 잎 지는 소리와 새벽 달빛과
치차(齒車)같이 덜컹거리는 못난 추억과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은 혼자 떠나라 / 박노해 (0) | 2024.12.07 |
---|---|
동장군冬將軍 / 윤갑수 (1) | 2024.12.06 |
갈대밭에서 / 민영 (0) | 2024.12.04 |
그리움이 밀려 옵니다. / 박남규 (0) | 2024.12.03 |
12월은 / 하영순 (0) | 2024.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