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사전 / 이기철
- 누구나 가졌지만 시로 쓰면 진부한 것
그냥 첨벙 뛰어들었는데 인생이었다
언제나 눈앞에선 보이지 않고
뒤돌아보아야 보이는 그것
우편행랑으론 배달되지 않고
발끝에 머리 위에 모래처럼 쌓이는 그것
아무리 화사해도 빌려 입을 수 없는 그것
도서관에 가면 있지만 모두 남의 것인 그것
때론 놓친 기차같이 아쉽고 못 잡은 무지개같이 설레는 그것
왜 우는지도 모르고 명사산 모래처럼 우는 그것
죄짓지 않고도 성서와 불경처럼 무릎 꿇게 하는 그것
먹는 일 입는 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로 짠 피륙인 그것
사람들이 흔히 열 권 소설로도 모자란다고 하는 그것
때론 유행가처럼 절실한 그것
봉숭아씨처럼 뛰어나가지 못하고 살구씨처럼 문을 잠근 채 토라진 그것
불행보다는 달콤하고 행복보다는 쓰디쓴 것
아무에게도 배울 수 없고 누구도 가르치지 않는 것
빙벽 등반처럼 아슬아슬 제 힘으로 올라야 하는 것
재봉틀로 수선할 수 없는 것
제 손으로 버려야 하는 것
낮에는 죄를 짓고 밤에는 참회록을 읽게 하는 그것
벽돌 한 장만 잘못 뽑아도 집 전체가 무너지는 그것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내가 모래가 되는 그것
그만 놓아 버리고 싶은데 끝내 놓을 수 없는 그것
닦아도 씻어도 걸레처럼 얼룩이 남는 그것
눈앞에는 없고 등 뒤에만 쌓이는 그것
비범한 사람들의 걸어간 발자국을
부지런한 어느 펜이 평전에 담는 그것
소설로 쓰면 생생하고
시로 쓰면 진부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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