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8,15 세대.

덕 산 2023. 8. 18. 10:38

 

 

 

 

 

8,15 세대. 

 

박천복 2023-08-14 08:26:51

 

서울대의 주경철교수는

‘지금  80 대중반이상의 세대는 관솔불에서 형광등까지 파란만장한

격변의 세월을 살아오신 어르신들 ‘ 이라고 했다 .

정곡을 찌르는 설명이다 .

파란만장 (波瀾萬丈 )은 곡절이 많고 변화가 심하다는 뜻이며

격변 (激變 )은 갑자기 심하게 변하는 것이다 .

말하자면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의미다 .

나는 일제식민지시절인  1937 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

그때 내 이름은 도꾸야마 도시이찌 (德山俊一 )였다 .

유치원을 거쳐 일본소학교에 다녔으며 아침 조회시간에는 기미가요를

불렀고 천황폐하가 계신 동쪽을 향해 절을했었다 .

그리고  1945 년  8 월 15 일의 광복 .

2 차대전 말미에 참전 ,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격파한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했다 .

나는 그때 처음으로 탱크와 함께 노란머리 , 푸른눈 , 높은코의 소련군을

봤다 .

그들은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일이 잦았고 ,

시장에서는 음식을 집어먹고 그냥가곤했다 .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짐승같은 로스케 ’ 라고 불렀다 .

일본소학교는 인민학교로 바뀌었고

김일성장군에 대해 배웠다 .

그때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으며 내 본래의 이름도 찾았다 .

 

일년이 지났을 때 ,

엄친께서는 공산치하에서는 살수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가중 우리식구만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

강계에서 평양을 거쳐 황해도 해주까지는

간헐적으로 다니는 기차 , 도라꾸 (트럭 ), 소달구지등을 얻어탔으며

상당한 거리를 걸어서 보름만에 해주에 도착했다 .

월남하려는 몇 가족이 돈을모아 안내인을 샀고

야밤에 안내인을 따라 인민군의 눈을 피해  38 선을 넘었다 .

그런데 안내인이 돌아간후 우리는 다시 로스케에게 붙잡혔다 .

그들은 우리몸을  DDT 로 소독한후 연백역까지 데려다줬다 .

그들은 로스케가 아니라 남쪽에 주둔하고있는 양키였다 .

연백역에서 협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후 친척집 사랑방에 거처를 정하고

엄친은 취직을위해 매일 밖으로 나갔다 .

나는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번에는 이승만 박사에 대해 공부했다 .

그때 내짝은 일본에서 귀국한 교포였는데 우리말도 , 한글도 몰랐다 .

담임선생님은 내가 책임지고 그 아이에게 우리말과 한글을 가르치라고

했다 .

다행이 엄친이 취직이되어 우리는 빠르게 생활이 안정됐으며 엄친의

근무지인 인천으로 가게됐다 .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으며 엄친이 출장중이어서 우리는

어머니와 세남매가 가까운 시골로 피난을 갔으며 정말 죽을고생을 다 했다 .

인천상륙적전으로 다시 집에 돌아갔지만  1,4 후퇴로  LST 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피난갔다 .

부산의 겨울피난살이은 물이 부족해 크게 고생했으며 우리는 가마니로 지은

움막에서 살았다 .

나는 영도다리옆 양과점 천사당에 취직했으며 와풀과 도나스를 구웠고

모찌싸는 기술도 배웠다 .

9.28 수복으로 작은배를 타고 인천집으로 돌아갔다 .

나는 전쟁기간을 통해  ‘참담하다 ’ 는 말의뜻을 깨달았으며

3 년동안의 전쟁은 우리군인과 민간인  200 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대학  2 학년을 마쳤을 때

징집영장이 나와 춥고배고픈 자유당 군대에 입대 , 논산에서 훈련받고

의정부의  101 보충대를통해 전방부대인 수도사단 기잡연대에 배치되어

사병으로 복무했다 .

보리밥에 소금된장국 , 그것도 양이모자라 늘 배가 고팠다 .

내무반에서는 문맹인 병사들의 편지를 대필해줬고 , 답장을 읽어주는일을

도맡았었다 . (그때는 군인중 문맹이 많았다 .)

따라서 신참졸병의 혹독한 대우는 면했다 .

 

 

 

 

 

 

제대후  3 학년에 복교했을 때

4.19 가 터져 데모를 해야 했으며 그후  5.16 과  5.18 을 겪었다 .

5.16 은 우리나라가 산업화 경제대국이 되는 시발점 이었다 .

단군이래 조선백성이 하루세끼 쌀밥을 마음껏 먹은게  1979 년의

박정희의 통일벼 덕분이었다 .

나는 지금도 박정희의 가장큰 업적이 쌀밥이라고 생각한다 .

5.18 은 그게 시민반란인지 민주화운동인지는 앞으로 역사가 그 진실을

밝혀줄 것이다 .

내가 겪은바로는 그렇다 .

언제 ,어디서 , 누가까지는 알겠는데 무엇을 , 어떻게 ,왜는 아직 모른다 .

대학졸업후 나는 한일합작의 특수강회사에 입사했으며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높은 청계천의 삼일로빌딩이 우리사옥이었다 .

나는  28 층에서 근무했다 .

이후  70,80 연대의 산업화기간에는

월차 ,연차 ,휴가도 없이 온 몸을던져 일했고 청춘을 불살랐다 .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미친 듯이 일만했다 .

마산에  36 만평의 대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공장건물  5 만평을 짓고 그안에

생산시설을 설치하는 일은 전쟁같은 대 역사였다 .

우리 간부사원들은 회사가 빌린 여러곳의 여관에서 잠만자고 하루세끼는

공장식당에서 먹었다 .

잔업과 야근은 일상이었고 현장에서 가마니를 깔고 새우잠을 자는것도

다반사였다 .

우리 스스로가 봐도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

 

압출공장 기계설치 때문에 와있던 소련기술자들은 낮에도 보드카를 마셨으며

압연기 설치를 맡은 독일기술자들은 정말 전문가들이었다 .

용해로설치와 특수강 공정을 위해 와있던 영국인들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고

혼산탱크설치를 맡았던 프랑스 기술자들은 유명한 땡땡이들이었다 .

그래도 우리와 함께 온갖고생을 같이한 것은 일본기술자들이었다 .

3 년후 첫제품이 출하됐고 그중 일부는 브라질과 대만에 수출됐다 .

수출품이 마산항에서 선적되던달 우리들은 제품상자에 손을 얹고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

그리고 그 오랫동안의 고생은 지금도 가슴속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지금 나는 정년은퇴후  20 년차의 노인이다 .

일생을 통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

마음껏 책을읽고 ,

블로그에 올릴글을 열심히 쓰고 ,

첼로를 연주하며

걷기운동과 계단오르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 .

큰 지병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식사도 잘 하는 편이다 .

 

87 년동안의 일상을 돌아보면

주경철교수의 말 그대로 정말 파란만장한 격변기를 살았다 .

지금 우리나라 인구는  5,180 여만 명이다 .

그중  85 세이상은  231,000 여명이며

나와 동갑인  87 세는  31.680 여명이다 .

모두가 같지는 않겠지만 격변기를 살아온  8.15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

비록 그때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의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큰 보람을 느끼는것도 사실이다 .

한가지 노파심으로의 걱정은 ,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

근자 정치판을 보면 더 그렇다 .

그래도 현명한 우리국민을 믿는 믿음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

 

 

파란만장의  8.15 세대는

나라의 밑거름이 된 세대이기도 하다 ,ㅡ yorowon.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