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성(理性)에서 영성(靈性)으로

덕 산 2019. 10. 22. 13:59

 

 

 

 

 

 

 

 

 

김홍우(khw***) 2019-10-21 22:05:27

 

이성(理性)이치를 따져 묻는 성향이라고 한다면 영성(靈性)믿음으로 나아가는 성향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후자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무슨 유명 광고 문구와 결부시켜 유머러스한 이해로 웃음을 유도하는

목회자도 보았습니다. 이성은 우리사회의 질서와 화목과 화합 그리고 발전에 꼭 필요한 것이고 영성은

자기 자신의 신앙완성을 위하여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면 이성이 중요할까요.. 영성이 중요할까요..

 

물론 이 두 가지는 제각각의 역할로 중요한데 먼저는 이성을 앞에 두고 싶은 이유로는 이성이 영성으로 나아가게

하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듯 망설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영성으로 나아가는 모양을 가장 앞서

가로막는 역할도 역시 이성이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해하는 것으로서 아는 것아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한 뿌리에서의 괴리(乖離)를 생성이며

이 두 가지가 서로 싸우는 것 역시 알고자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곧 이성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바라보는 이성의 저항이기도 하지요. ‘불합리를 말하지만

그 모양 역시 이성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역시 내가 알고 이해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이성을 내 던진

불합리의모양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종교는 영적인 것이며 과학은 모든 사물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거기에서 내려진 결론을 숭상하는 모양인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이 쯤에서 논지의 방향을 틀자면, 세계 4대 종교가 모두 동양에서 나왔으며 반면에

모든 과학기계 설비 장비 등은 서양이 앞서가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양 사람들은 영적이며 서양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과학을 가지고 상대적이거나 대립적 구도로 놓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두가 인류에게 결정적 유익함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람들 쪽이 모든 사물의 연구와 실험의 결과를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에 반하여 동양 사람들 쪽은

연구 될 수도 없고 실험해 볼 수도 없는것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두 사고의 간극이 크고 메워지기가

어렵습니다. 즉 대부분의 동양 사람들에게 신()은 어떠한 과학의 형태로도 증명되지는 않지만 모든 존재의 정점에

있고 그래서 기원과 기도의 형태가 우선은 신을 향하는 경배의 모습을 같게 되지만 비록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서양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 사고방식에는 여전히 과학적 분석과 실험의 모양에 고정되고 또 집착케 하는 것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 갭의 모양이 여전히 현저한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천사의 날개입니다.

 

날아다니는 것이라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는 서양식 사고방식과 사람은 알지 못하는 영적 동력으로 자유롭게

시 공간을 이동하는 존재라고 하는 동양식 사고방식에는 결코 메우지 못할 크고 먼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타고 난것으로서 아마 모르기는 해도 끝까지 서로의 모습을 주장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과학적 메커니즘 Mechanism

필요하다는 쪽과 그런 것쯤이야 가볍게 넘어서는 신들의 세계의 대결구도가 그래서 펼쳐지는 것이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날개는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도 언급되지도 않고 있지만 많은 기독교 성화 명화들 속에서

엄연히 커다란 두 날개를 가진 존재로 나타나고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사고를 가진 이들로부터 도대체

그 날개를 가지고 어디로 날아가겠다는 것이냐? 우주공간으로?”하는 핀잔성 비아냥을 받고는 있지만 그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그림의 기술을 주도한 것은 과학으로 표현되어진 예술이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려니하고 크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굳이 꼬집어 말하자면 이것도 영성에 대항한 이성의 작은 승리라고나 할까요.. 그만큼 과학이라고 하는 분야가

우리 인류 모두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의 자리와 지경을 확장하여 나가고 있는 모양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중세 때만 하여도 모든 사람들의 삶의 중심과 핵심은 이며 신앙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그 균형은

차츰 더 과학 쪽으로 기울어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신 보다는 보이고 만져지며 내 육신적 소용의 충족을 더하여 주는

객관의 형체 과학의 실험결과와 그 기능과 능력을 더욱 더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냉정한 판단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래서 지금도 세상에서 부국(富國)이라고 하는 나라는 과학을 신봉하는 국가들이며

반면에 많은 빈국(貧國)들이 영적인 것을 추앙하고 신봉하며 섬기는 나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느 쪽이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느냐하는 것으로 본다면 익히 눈앞에 드러난 대로 과학적 신념을 이성화하여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라고 하겠지만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는 물음 앞에서는 그 응답도 대답도 정답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물질의 충족으로만 채워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동서양 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육적 조건이 다 채워져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그의 마음에 채워져야

할 것이 뭔가 여전히 남아있고 또 채워지기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또 무엇입니까.. 이 역시

과학적 연구와 실험으로는 정답의 고지에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과학으로 사람의 마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시로부터 세상은 사람이 아닌

로봇들의 세상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것이지요.

 

현대의 로봇이라면 사람의 생활에 도움과 편리를 주는 각종 기계와 그 장치들이라고 할 것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산업의 생산라인도, 자동차도, 컴퓨터도 그리고 커피포트도 다 로봇입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사람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수준의 기계들이지만 불원간에 스스로판단하고 행동하는 로봇들이 나올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기계들은 기름이든

전기이든 그 동력만을 필요로 하고 그것이 충족 될 때에 움직이며 살아있지만 또 혹 엄청난 정보적 계산으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한다고 하여도 거기에서 신을 향한 영성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유일신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래서 그 존재 속에 부여 받은 바가 로봇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사자, 코끼리 등도

그 생명의 부여 받음의 절차가 사람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생각하며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연구하여 그 찬란한 결과물을 내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 한계로서의 구분과 구별이 너무나도 확실한 두 존재

사람과 동물.. 그래서 우리는 신의 특별한 선택과 은총을 말하게 됩니다.

다르게는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짐승들도 훈련을 거치면 참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문자를 구분하여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서 온갖

서적을 줄줄 읽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여도 신을 향한 경배와 예배의 영역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바로 영성이 없기 때문인데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주어지지 않은 것은 가르쳐주고 배워도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고귀한 존재이며 만물을 대표하고 만물을 맡아 주관하고 정복하며

다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인간은 야성(野性)에서 이성(理性)으로 또 거기에서 영성(靈性)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그냥 움직이는 동물이며 과연 거기에 걸맞게 먹고 입는 것 같은 육체의

생존과 생활조건의 충족에만 만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시대의 석학으로 글쓰고 책만드는 기계 같으신 어르신 이어령 선생님이 쓰신 지성에서 영성으로나 다시 정필한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선생님께서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많은 책들을 쓰시면서 또 이의 없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이시대의 대표적 지성으로

자리매김을 하셨지만 여전히 모르심에 대한 발버둥의 모양이었다고 한다면 그 표현이 큰 실례일 것이겠지만

허허 하시면서 넉넉히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며 용서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지성(知性)이라면 아는 것 아는 것을 능력으로 세우는 것이라고도 할 것인데 영성(靈性)이라고 한다면 그 알았던 것을

내어던지게 하는 것 그리고 아는 능력이라고는 사실은 없다는 냉정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정점은 지성이 아니라 영성에 있는 것이며 이어령 선생님께서는 여든 평생을 넘기시며 기어코

그곳을 밟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성도 과학도 모두 유익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결국 영성의 고지에 발을 디뎌야 합니다.

사람은 호흡의 존재를 너머 영의 존재로서 완성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들이 다 되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영성의 날개로 저 하늘 높은 곳 참 진리의 세계로

솟구치는 복 된 이들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산골어부 20191021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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