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8-12-31 11:12:27
모든 모양과 모습을 하나님께 맞추는 생각과 삶의 모양이 성도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사안이나 전개에 대하여서 우선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 즉,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하는 것으로 받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들 중에서도 성도 된 이로서는 좀 더 깊은 묵상으로 접근이 필요합니다. 곧, ‘내 마음’ 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지고 있는가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지요. 즉,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모양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정의이고 진실이며 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다윗과 사울 왕’의 관계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군사들을 데리고 줄곧 따라다녔지만 하나님은 그의 앞길을 인도하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죽고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승리한 것입니다.
사울왕도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임을 익히 알고 있었음이 성경 도처에서 읽혀지지만 그는 자신의
욕심과 시기의 마음을 꺾지도 내려놓지도 않고 못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권세와 권력으로 다윗을 죽이고
승리할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사로 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착각’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사울 자신이
하나님의 뜻하심과 계획하심 그리고 보존하심과 보호하심을 부정하고 거스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였기 때문이지요.
성도이십니까? 교회도 목사도 성도들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 목사 성도 들 일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늘 부족하고 성경 속에 나오는 선지자와 성군들 역시 그들의 열심과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늘 실수 하고 깨닫고 회개하고 회복하기를
반복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온 천하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의인’을 하나님
앞에서 득죄함이 없는 자, 온전한 자, 선한 자, 그래서 완전하여 흠이 없는 자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때 그러한 것이지요.
그것은 곧 ‘거룩’의 경지로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경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굳이 사람 중에
누군가를 세워야 한다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을 살펴보자면 온통 내 맘에 들지 않는 것들이 내 맘에 드는 것들의 천배 만 배 인 것을
우리는 이미 잘 경험하여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또한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묵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맘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꼭 드는 모양과 모습인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의 기준’ 에 앞서서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는 믿음의 지혜로운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된 이들 중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은 있지만
‘지혜의 관을 쓴 믿음’의 사람들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과 말씀이 있다면 그것이 왜 무엇 때문에 주어진 것인지 그 배경의 뜻을 잘 파악하여야 하고
또 그렇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여야 하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만들어질 수 않거나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믿음도 있고 지혜도 있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적군에서 총을 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러한 경우는 예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총을 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 것입니까?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상대방을 죽여야 합니까?
아니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며 적의 손에 죽어가야 합니까..
이러한 문제 앞에서 막연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많은 적들을 죽이고 있는 성경 속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애써 기대고 의지하려하지 말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의 진행
속에서 앞을 가로 막는 ‘적들을 진멸하고 또 더하여 남김없이 죽이라’고 까지 하셨는지를 돌아보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계명으로 막으셨고 지금도 막으시는 ‘살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지혜가 동반되지 아니한 믿음은 자칫 ‘마구잡이’로 나아갈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 사설들이 생겨나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들도 모두 성경에 기인하여 자신들의 신앙과 믿음을 정의합니다. 즉 이단들도 모두
성경을 경전으로 가지고 받들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많은 영혼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결과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지요.
그들은 성경 곧 ‘하나님의 법’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열심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는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작심을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적극 이단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처음에는 신실함과 열심히 나섰기에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드러내지만
결국에는 하늘 영광을 가리며 소멸하게 되는 경우 역시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 및 모든 이들의 열심과 수고의 정의 모양을 하나님께 맞추지 않고 ‘자신에게’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내 맘에 안 드는’ 모양들을 원수처럼 취급하고 대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맘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도 그러한지..?’ 하고 살펴보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즉 모든 사물을 바라볼 때
‘나’를 기준으로 하는 시각을 내려놓는 것이 ‘성도 된 삶’의 모양으로 새롭게 가져야만 하는 모습으로서 바로
‘변화 된 모습’이고 ‘거듭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나의 잣대’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의 잣대’를
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도 중에서도 세상에
미혹 되거나 시험에 들지 않는 참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진짜’를 원하십니다. 지금을 돌아보십시오. 온갖 ‘가짜’가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서 서로 속고 속이며
해치고 해함 받는 일들이 세상에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들어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목회란
우선 ‘나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발휘 되는 ‘정직함과 순전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이며
성도들 역시 자신의 믿음이 결실로 나아가는 불꽃으로서의 지혜를 가져야 하며 이러할 때에 주변에 모든
악한 것들을 활활 태워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모양은 바위 같아서 거기에 늘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모양으로 자신을 보존하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칫 외곬 판단 만을 거듭 하면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게 되는 모양이 되기도 합니다.
즉 ‘돌 같이 굳은 믿음’은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지만, 그 보다 시냇가에 심기어진 과실나무는 더욱 좋은
것으로서 모두에게 열매를 내어주는 공로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더욱 쌓게 됩니다. 이제 내일로 성큼
다가온 2019년 신년 새해에는 이러한 이들이 더욱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축복합니다.
- 산골어부 20181231 / 출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긍정적인 오픈마인드 (0) | 2019.01.10 |
|---|---|
| 2019 년 을 맞으며 (0) | 2019.01.07 |
| 기억이 소중함을 배우게 된다. (0) | 2018.12.31 |
| 좋은 꽃씨는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0) | 2018.12.27 |
|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와 ‘빚 (0) | 201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