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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별사(歸去來別辭) / 지게의 독백 / 임 보

덕 산 2016. 6. 21. 14:09

 

 

 

 

 

 

 

 

 

귀거래별사(歸去來別辭) / 지게의 독백 

                                      - 임 보 -

 

주인님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어디선들 입에 풀칠이야 못하겠오.

우리가 떠나왔던 그 고향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산 좋고 물 맑은 그 산골로 어서 내려갑시다.

지금은 고향도 많이 변해서 우리 같은 놈

발붙일 곳 없어져 간다고 합디다만

 

경운기 구루마 같은 놈들이사 들판에서 놀라 하고

산에 오르내리는 일이사 그래도 아직은

제몫이 아니겠습니까.

 

여름이면 풋풋한 풀짐,

겨울이면 삭정이 낙엽 얽어 집채만큼 들어 지고

마을 뒷동산 언덕빼기 신명나게 내려올 적에

 

이놈 목다리 장단 두드리며 구성지게 뽑아 올리던

그 육자배기 가락 주인님 젊었을 때

그 폭포수 같던 목청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가을이면 낟가리 곡식 휘청휘청 짊어지고

노적 쌓던 그 달밤도 즐거웠고요.

볏섬 지고 물레방앗간 오르내리면서

 

 

 

 

 

 

 

큰골댁 담장 너머 보름달 같던 곱단이 얼굴 훔쳐보며

볼 붉히던 주인님 생각나시지요.

그 곱단이가 주인님 마님 되어

우리 셋이 밭일 가선 내 등에 그 색시 올려놓고

덩실덩실 맴돌다 엉클어져 콩밭 뭉개던 일도 알고 계시지요.

 

읍내 장날이면 발대 얹어 닭 돼지 잡곡들 싸 짊고 가서

팔아다가 조기 북어 미역 어물 등속 마련하여

명일 제일 조상 제사상도 푸짐하게 보았고요.

 

허기사 즐거운 일만 늘 있었던 건 아니지요.

읍내 신작로 낼 땐 강변에 자갈 모래 몇 달을

등이 휘게 져다 부려도 보고,

 

동란 땐 총부리에 끌려 탄약통 걸머지고

유탄이 비 오듯 퍼붓는 구름재 그 험한 능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던가요.

 

그러나 정말 슬펐던 일은 염병이 불꽃처럼 번지던 어느 봄날

곱단이 마님 서른도 채 못 되어 세상 떠나던 일이었지요.

거적에 싸인 마님 등에 업고 산천 갈 때에

철쭉들도 우리처럼 목이 터지게 울고 있었지요.

 

그리고 주인님 우리가 고향 산천 버리고

떠나온 것이 아마 그 무렵이었지요.

아무 물정 모르는 우리 시골것들 홧김에

서울 대처에 올라오기는 하였지만 눈도 멀고 귀도 먼

일자무식 우리들이 뭐 해먹겠다고 올라왔을까요.

 

논 밭 팔아 몇 푼 손에 쥔 것 오다가다 만난 뺑덕에미 밑구멍에

다 털어 넣고 청계천 다리 밑에서 훌쩍훌쩍 울던 것도 생각나지요.

서울역 광장, 동대문 시장, 을지로, 종로통 퍽도 싸대고 다녔지요.

 

 

 

 

 

 

그래도 그때는 제법 일거리들이 있어서 종일 헤매면

국밥에 막걸리 사발이라도 마실 수 있었어요.

그 자유당 시절까지만 해도 그런 대로 우리에겐 살만 했지요.

 

손수레, 용달, 택시들이 쏟아져 나오자 세상은 개판이 되었지요.

고속도로 뚫리고 전철 생겨 사람들은 개미떼처럼 북적대기

시작했지만 이젠 우리 쳐다보는 놈 한 놈도 없어요.

온종일 터미널 입구에 주저앉아 기다려 봐도 우리에게

짐을 맡기는 어리석은 자는 아무도 없어요.

 

어쩌다가 물정 모른 시골 아낙네들이 고구마 보따리라도 싸들고 오다

우리를 부르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겨우

차 타는 곳까지 옮겨다 주는 일일 뿐 일다운 일거리는 택시 용달들이

다 독차지하는 세상 어디 분하고 원통해서 살 수 있겠오.

 

주인님 이 복잡하고 한 많은 서울 땅 어서 등지고

우리 고향으로 떠납시다.

주인님 이제는 쓸모없다고 혹 저를 내던질 생각은 않겠지요.

주인님 저는 남이 아닙니다.

 

한 평생 주인님 등에 붙어 다니던 등뼈입니다.

주인님의 등뿔 주인님의 한 부분입니다.

어서 저를 데불고 고향으로 가 주세요.

 

고향에 가기만 하면 봇맥이 자갈짐도 내가 다 지고

오뉴월 똥장군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어서 돌아갑시다.

어서 돌아갑시다.

 

--- 시집 겨울, 하늘소의 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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