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삶이라는 연극의 역할놀이 / 법상스님

덕 산 2022. 9. 22. 16:01

 

 

 

 

 

삶이라는 연극의 역할놀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모습,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나', 내가 '이러이러하다'라고

알고 있는 내가 바로 진짜 나일까?

모든 것은 다만 아상, 에고의 감옥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상황과 환경, 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회사에서는 사장이거나 과장, 말단 사원일 수 있고

집에 돌아오면 한 집의 가장이거나 자식일 수 있으며

또 주말 모임에 가면 회장이거나 총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의 아상과 에고의 위상은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우리가 바로 그곳에서

해야 할 몫의 연극을 해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들의 특성은 어떠한가?

어느 한 가지 역할만이 나의 본래적인 자아이거나

'나의 본질은 이거야'라고 할 만한

정해진 본연의 역할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역할을 바꿀 뿐이다.

 

바로 이 역할 놀이,

연극의 배역을 끊임없이 상황 따라 바꾸어가는

배역 놀이야말로 우리 삶의 생생한 현실이다.

바로 이 상황극을 잘할 줄 아는 것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초점이 된다.

 

삶의 배역을 온전히 잘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배역이 주어질 때

바로 그 배역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완전히 용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 바로 그 배역과 행위가 완전히 하나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배역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최고의 배우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배역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역할에 몰입함으로써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영화가 끝나고 다른 영화에서 새로운 배역이 주어지면

이전의 역할을 잊고 주어진 배역과 하나를 이룰 줄 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역할 놀이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 역할이 주어질 때 온전히 깨어 있는 의식으로 최선을 다하되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최선을 다할지언정

그 역할이 나 자신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잠시 인연 따라 주어진 배역과 나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최선의 집중으로 그 배역을 행할지언정 역할 자체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 배역은 실체적인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내가 연극을 한 것일 뿐이다.

 

그 역할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며

아주 잠시 내게 주어진 이번 생의 배역일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매 순간 어떤 '역할'로서가 아닌

순수한 '한 존재'로서 바로 그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게 된다.

 

그리하면 모든 존재와의 만남은 부처와 부처가 서로 만나는 것 같은

깊은 영적 교감과 성숙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역할을 하되 그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모든 관계는 비로소 순수해지며 삶의 영적 진보가 시작된다.

그렇게 만나야 모든 관계가 존재의 성숙과 진화를 위한

창조적인 관계로 발돋움한다.

 

머물지 말라.

그것이 '나'라는 착각을 완전히 거두라.

배역을 하되 마음은 배역에서 완전히 떠나라.

배역은 단지 배역일 뿐 내가 아니다.

그러면 참된 진짜 내 배역은 무엇인가.

가짜 역할이나 배역 말고 진짜배기 '나'는 누구인가.

 

배역에 집착함 없이 다만 순순한 깨어 있음으로

순간순간의 역할을 관할 때

비로소 가짜가 아닌 진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

참된 나를 찾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뿐이다.

 

이번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과 배역을

온전한 집중과 알아차림으로 행하되

거기에 집착하거나 얽매임 없이 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이끄는 지고의 수행이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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