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20-01-27 11:09:40
어떤 쪽을 택하시렵니까.. 내가 지금 풍족함으로 잘 살고 대신 자식이 나중에 찢어지게 못 사는 것과 내가 지금 찢어지게
못 살고 대신 자식이 나중에 풍족함으로 잘 사는 것 중에서 말이지요. 허허. 무엇이 그토록 “찢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긴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가난하고 궁핍한 삶으로 인하여 이렇게 저렇게 기어코 ‘찢어져 버리고야 마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 여자 쪽 즉 어머니 같은 경우는 90%이상이 후자를, 남자
곧 아버지들은 50%정도가 후자를 택한다고 하는 글을 어떤 잡지에서 읽었는데 다 같은 자식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신의 대를 이을 ‘씨’ 라고 생각하는 데에 반하여 어머니들은 자신의 ‘피붙이’ 즉 분신(分身) 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차이 일 것이라고 합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들은 자신의 씨를 ‘던져 뿌린’ 모양의 것에 비하여 어머니들은
그 씨로 잉태된 것을 내 몸 안에서와 몸 밖에서도 오랫동안 ‘키우는’입장과 형편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뿌린 사람은 역시나 세상과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계속하여야 하지만 그 씨를 받은 사람은 그 때부터 그것을
잘 간직하고 싹틔우고 열매로 나올 때가지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열심히 하여야 할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내 뱃속에 나와 한 몸으로 오랫동안 있으니까 늘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힘들게 낳아서도 곧바로 젖을 물려야 하며
재우고 먹이고 아이의 건강을 주의 깊게 확인하는 등 자신의 피붙이의 생존에 이상이 없게끔 그야말로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을 하게 됩니다.
물론 남자 된 아버지들이 자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기양육’의 시기에서 만큼은
어머니처럼 ‘직접적’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이 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수고가 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직접적으로 아이를 만지며 키우고 아버지는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는 것이 한 가정의 일반적이고 보편적
‘아기양육’모양이 자연스러운 일반 보편적 관습이며 풍습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아기가 ‘커갈수록’
아버지의 역할과 할 일이 더욱 확대되어지지요. 어릴 적 ‘양육의 책임’이 엄마에게 더 크게 지워졌었다면 이제는 ‘교육의 책임’
이 아버지 쪽으로 크게 넘어가는 모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이것도 엄마들의 몫이 되어가는 모양이기도 합니다만..)
아버지들은 ‘바깥양반’으로서 책임을 다하여야 하기에 그야말로 ‘바깥’에서 수고 하고 땀을 흘리면서 ‘안 쪽’인 가정의 ‘안주인’과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공급하여야 할 책임이 있기에 모든 힘듦과 어려움과 고생과 시달림도 다 감수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일에 매진(邁進)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고단함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라는 말이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 자신들이 당면하게 되는 모든 불리한 상황 속에서 상대방에게 선처를 구하는 모양도 이러한 자신의 현재를
강력 어필하게 됩니다.
지난 2차 대전 때의 기록에 보면, 독일과 연합군들에게 각각 사로잡힌 포로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가장 읍소(泣訴)하는 것이 바로 “처자식이 있다” “늙은 어머니가 있다”라는 것들이며 기실 이것이 가장 잘 먹혀(!)들어간
읍소의 내용들이었다는 전언들을 종합하여 보면 과연 이 세상에는 ‘가족이 없는’이들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쯧,
그렇다면 전쟁을 하지 말아야지.. 긴 탄식의 한숨을 내쉬게도 됩니다..
그래서 또 생겨난 말이 “자식들은 죽기까지 어머니에게 기댄다.”라는 것이지요. 그렇듯 어머니에게 길러져서 자라나고 장성하여 군대에 가고 전쟁터에 나가서 포로가 되었을 때까지도 어머니를 팔아(?!) 살아남으려는 모양 때문입니다. 허허. ‘전쟁터에 나간 아이마저도 지켜주고 기댈 벽이 되어 주는’ 어머니의 위대한 자기희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또한 아들의 ‘무사 생환’을 위한 간절한 바람의 기도와 기원이 그 영혼의 움직임으로도 함께 한다고 볼 수도 있지요. 어머니의 기도 그래서 능력 있고 위대합니다.
이러한 참 이치 곧 진리적 초석 속을 파고들면서 이간질을 하고 그 갭을 넓히려는 그리고 기어코 넓혀놓는 것이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부모형제 친지 친구 이웃 들 간의 돈독한 우정관계를 한껏 비웃으면서 마치 오징어다리 찢어 놓듯이 하려하고
있지요, 거의 모두라 할 수 있는 ‘배신의 모양’들이 여기에서 발생됩니다. 그래서 부모를 내팽개치는 패륜아들이 생겨나고
심지어는 부모형제 간에 서로 죽이는 일들이 지금도 발생하여 저렇듯 TV뉴스를 장식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지.. 휴..
“자식들도 다 필요 없다.”
어떤 어르신이 자신의 당면 현실과 그러한 속에서도 자신들의 현재 만을 살아가는 자식들을 향하여 내뱉듯이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의 얼굴 가득한 주름 속 노안(眼)에는 깊고 깊은 시름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또 어떤 사람은 “나의 인생은 나의 삶에만 주력하면 된다. 자식들은 또 그에게 주어진 각각의 날들이 있기
때문이고 각자가 헤쳐 나가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특히나 우리 모성적 인륜에 비추어 볼 때에는 도리도리
개를 가로 젓게 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온 일생’을 자식들에게 ‘몽땅 바치는’모양과 풍속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못살아도 자식은 잘 살아야 한다, 나는 죽어도 자식은 살아야 한다 는 등의 생각들이 물론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하여 ‘나의 삶’이 피폐하고 망가지고 없어진다면.. 이것 또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나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식이 나아갈 앞길의 터를 닦아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혹 내가 직접 그 자식의 인생이 되어
그 삶을 ‘열심히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제 주일 점심들을 교회식구들과 함께하면서 나온 이야기들인데 만년을 지내시는 한 집사님이 먼저 “우리도 서양처럼
아이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그 후에는 자신들이 알아서 살아가도록 하는 독립심을 키워주고 단호히 그렇게 내모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우리나라 부모들이 평생 하는 ‘자식 뒷바라지’에서 해방된다.”라고 화두(話頭)를 던짐으로 시작되었던
이야기 속에 나온 것들을 적어 본 것입니다. 독자제위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물론 ‘자식들이 내 삶의 고통이다’라는
섣부른 전제를 놓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살’ 속에서 자식은 무엇이며 ‘자식의 삶’속에서 부모의 존재는 무엇인지에 대한
지혜로운 접근으로서의 시도 모양은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대화중에 불쑥 또 다른 어떤 집사님이 ‘찬 물’의 모양으로 끼어듭니다.
“뭘 복잡하게 생각해요. 지금까지도 그렇게 잘 살아왔는데 괜히 머리만 더 아파져요.”
그 말도 역시 또한 정답의 범위 안에 드는 것 같기도 하고..
- 산골어부 2020127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썰'이라는 말.. (0) | 2020.01.31 |
|---|---|
| 과연 해처럼 달처럼 (0) | 2020.01.30 |
| 산골마을 기차역에 앉아서 (0) | 2020.01.28 |
| 고동색 바나나 소회 (0) | 2020.01.22 |
| 기초생활수급자, 기초연금수급자 (0) | 2020.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