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우(khw***) 2019-12-23 19:55:40
부자(富者)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 이라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치를 정확히
잡아보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조금은 부족하고 모호한 풀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당시는 부자입니다.’라고 하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이도 있고 ‘당신은 가난합니다.’라고 하면 역시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부자’라고 하는
이들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부자의 기준은 어디에 얼마 만큼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이 부자’라든가 하는 식의 주관적 시선이라든가
해석과 풀이는 일단 뒤로하고 우리사회가 이야기하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고 부유하여 생활에 전혀 부족함이라고는 없는
객관적 부자를 생각해 봅니다. 우선 일단은 ‘돈이 많으면’ 부자이지요. 그런데 그 ‘많음’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숫자적 잣대를 갖다 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시대마다 시절 마다 달라질 수 있기에 그래서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늘 사람들에게 부자 소리를 듣는 이들의 구분을 어디에 둘 수 있을까 곰곰이 더욱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 어렸을 적에는 100만원을 가진 사람이 부자였습니다. 1950년 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무렵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살던
서울 사대문 밖에서 수 km 떨어진 곳 여전히 논이 있고 밭이 있던 동네 근처에서는 집 한 채 값이 3~5만원 하였고 저의
아버지가 매입하여 나중에 헐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지었던 초가집의 가격도 땅 40평 정도를 포함하여 3만 몇 천원에
구입을 한 것이라고 훗날 들었습니다. 그러던 시대였으니 ‘백만 원’이라고 하는 돈은 그저 평범한 집을 20채 정도도
구입할 수 있는 액수였고 그래서 백만 원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백만장자’라고 했던 것일까요..
지금은 아무리 서울 변두리 근처라고 하여도 ‘억’자를 넣지 아니하고는 집을 장만할 생각을 접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허름한 집들도 2~3억이고 크지 않은 아파트도 그 정도 가격대이며 재산이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10억대의 집들을
소유하고 있지요. 물론 작고 허름하여 가격도 싼 집들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눈여겨보려고 하지는 않지요.
그래서 저는 단순도식으로 평범한 사람들 보다 100배 정도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마음속에 정의를 내려 보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쩐지 현실 보편의 인식들이 정하여 주는 기준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처럼 아직도 ‘1억’이라는 재산은 가져 보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데 그런 정도를 보통 수준이라고 부르는 것
같고 그 절반 정도의 액수로 5천 만 원을 전 재산으로 가진 사람이라면 또 그냥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으며 각종 사회 복지 제도 속 서류 기장 속에서도 그러한 것 같아서 입니다. 그렇다면 그 100배 곧 5억 원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아니겠는가.. 물론 5천 만 원을 가진 사람에게는 ‘억대 부자’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보편으로 볼 때에는
또한 5억 재산을 가진 사람을 부자(富者)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10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까.. 곧 50억 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자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현금을 그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 부동산 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구분과 큰 차이를 두고 있지요.
그래서 거의 이론이 없을 것 같은 결론으로는 지금 작금의 시절에 현금 부동산 등을 다 합하여 100억 정도를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얼마가 되었든지 나보다 열 배를 더 가진 사람은 분명 나보다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쩐지 나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그렇게 될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나보다 100배 더 가진 사람은 나하고는
정말 근접할 수 없는 큰 격차가 있는 부자로서 나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해 버릴 수 있기에
정말 이 시대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보다 백배를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그 차이와 구분을 크게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만원을 가진
사람에게는 100만원을 가진 사람이 부자이고 또 그 사람에게는 1억 원을 가진 사람, 또 그 사람에게는 100억 원을 가진 사람..
이렇게 백배의 수치로 차이에 구분을 두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나를
누군가와 비교해서 ‘그래서 나는 그의 1/100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뱅이’라는 심정이 되어서 매사에 위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인생패자의 길로 곤두박질을 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가난한 빈자(貧者)입니까 많이 가진 부자(富者)입니까.. 분명히 누군가와 비교하면 빈자일 것이겠지만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한다면 부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작은 감자 10개라고만 하여도 같은
감자를 1개만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사람의 생각에 나는 ‘많이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역시 사회 보편에 비추어 가난하지만 지금 이 날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본 적’은 없고 또 ‘입을 것이 없어서 헐벗어 본 적’이 없으며 ‘잘 곳이 없어서 밖에서 이슬을 맞으며 누워 본적도’ 없습니다.
다행이고 감사하기는 합니다만 거기에는 늘 ‘만족’이라는 단어가 머무를 일 또한 없었기에 어릴 적 늘 나보다 ‘더 있는’ 나보다
‘더 많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옷이나 신발을 신은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지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의 도시락은 정부미 보리쌀밥에 김치 콩자반이었는데 하얀 쌀밥 위에 계란부침을 척 얹은 도시락을
가져 오는 아이들이나 알록달록 김밥을 가지런히 줄을 맞춘 모양으로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이 정말 부러웠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깐.. 어떤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운동장으로 나가서 빙빙 돌다가 물만 마시고 들어오던 아이들이 있었고..
그것도 부끄러웠던 것일까.. 교실 뒤편 후미진 곳 자리에 앉아서 삶은 감자 두어 개를 꺼내어 조심조심 아끼듯 아닌 듯
감추듯 목 메이는 듯 먹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누가 굶어 죽었다더라.’ 하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고 추운 겨울을 지날 때면 역시 ‘누가 얼어 죽었다더라.’고
수군수군 말씀하시던 어른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불쌍하구나..’하기는 하였지만 가끔씩은 어렵잖게 들어왔던 일들이고
나의 처지와 형편의 일도 아니었던지라 어린 아이였던 저는 공감과 연민을 일으키는 피부적 체감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지나고 난 후에야 쯧쯧 하면서 혀를 차게 되네요 불과 반세기 조금 넘은 전의 서울 변두리 사람들 속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된 것일까.. 물론 수고하고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한 대가로서의 결과이겠지만 본인
보다는 그렇게 수고한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또는 과연 오직 재산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결과로 그렇게 된 이들도 있을 것인데 그렇듯 ‘치열한 삶의 과정’을 지내는 동안에는 ‘배려’라는 단어가 끼어들 자리가
혹 없지는 않았을까.. 인정 있고 남의 사정을 알아주는 모양들의 개입도 애써 뒷전으로 보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괜한 걱정을 하게 됩니다.
허나.. 또 생각하여 보면 단순히 ‘괜한 걱정’ 만은 아니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언제고 주변을 돌아보면 분명 나보다 더 가난한 자들이 거기에 여전히 있고.. 그래서
언뜻 언뜻 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기 발견을 하게도 되지요. “그래.. 나는 가난하지 않아..”하는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우리 속담에 “콩 한 개도 절반 나누어 먹는다.”라는 것입니다. 콩 한 개는 물론 열 개를 먹어도
누구 한 사람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 속담의 핵심은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렇게 확대하여 해석합니다. ‘콩 한 개를 절반씩 나누어 먹고 죽은 이들의 얼굴은 평안하지만, 그 콩 한 개를 혼자
다 먹었지만 역시 둘 다 굶어 죽었을 수밖에 없었을 때 그 얼굴들은 일그러져 있는 모습으로 발견 되어 진다’라고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부족이어서 모든 것이 마지막 장면들로 변하여 버리는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평안한 얼굴로, 또 어떤 사람은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을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요. 누구의 것이든 삶은 행복해야 하고 행복은 만족에서 오는 것인데 그 만족은 움켜잡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주는
사람에게만 만들어진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서 또 생각나는 것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이긴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만
그렇듯 마지막에 웃는 얼굴로 죽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가 분명하다는 데는 손사래를 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죽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웃으면서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바로 ‘웰빙WellBeing’을 어떻게든
넘어서는 ‘웰다잉 WellDying’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죽는 모습이 그의 지난 일생의 내용을 말하여 준다는 것에
동감하고 동의합니다.
지금 부자입니까 빈자입니까.. 사실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품격 있는 죽음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자라면 더욱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시고 혹 빈자라 하더라도 분별없는 욕심을 품으려는
온갖 발버둥과 몸부림으로 인생을 망치지 마십시오.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늘 ‘선한 열심’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바로 그 모습에 바라고 원했던 부(富)함이 슬며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지금도 웃고 늘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산골어부 20191222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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