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에 대하여
김홍우(khw***) 2019-12-04 12:23:04
“인간은 자기가 갇혀 있는 감옥의 문을 두드릴 권리가 없는 죄수라 하더라도
인간은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스스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명언 중에 하나로 알려져 뭇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요. 참 옳고, 멋지고, 아름다우며 또 의미심장하여 마음에 깊이 새겨 볼 말이기도 합니다.
“신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라는 구절은 곧 인간의 생명은 그 소유권이 신에게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으로서 인간이 생명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지도 못하고 또 자유로워서도
안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천명하고 있음에 다름이 아닙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는 말 역시 즉 어렵거나 힘들거나 고통스럽거나 하여 자결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작금의 우리 기독교에서도 자살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죄악으로
가르치고 있고 그러한 점에서 맥을 같이 합니다. 즉, 생명은 그것을 주신 분 곧 하나님이 그 주인이신데
그의 허락이 없이는 그것을 함부로 포기한다든가 내 팽개쳐버린다든가 하는 모양으로 무가치하게
다루어서도 또는 소홀히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자신의 하나 뿐인 생명을 무가치하게 또는 소홀히 여길 수가 있다는 것일까..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이들이 있지만 그 모두가 ‘좋아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고 ‘견디다 못해’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의 압박과 압제에 견디지 못한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이유와 어떤 상황 속에서의 처지와 형편 같은 것이라고 할 것인데 그 중에서도 배신과 절망 그리고
형편과 처지의 난맥상에서.. 또 가난 궁핍.. 등의 이유들이 있으며 드문 경우로 누군가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한 모양으로서 자기결단 등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스스로 죽었겠느냐..”
하는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만 또 다르게는
“그렇게 죽을 각오로 하였다면 해내지 못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말들도 많이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후자의 편에 서게 됩니다. 전자는 상황의 위급함과 막다름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겠고 후자는 의지적 투혼의 부추임을 들어 말하는 것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모두가 사실은 다 ‘제 삼자’의 입장이고 시선이므로 그렇게 세상을 떠나간 이들의 심정과
당시의 현재를 다 헤아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물론 이 ‘힘들고 어렵고’ 혹은 ‘더럽고 치사한 세상’을 떠나버리기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걔 중에는 자신이 그렇듯 ‘죽어주어야’ 역설적이게도 ‘잘 살 수 있는 이들’ 이
있어서 자신의 삶을 제물처럼 희생시켜 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쯧, 누구라도 그러한 ‘자기결정’에 대하여서
함부로 뭐라 평가와 비난의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자기결정의 모습이 자살(自殺)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적에는 쯧쯧 혀를 차면서 상기한 말들을 하게 되는데 물론 책망과 비난이라기보다는
마음 아파하는 것으로서의 깊은 탄식을 동반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비록 자신의 결정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 던진 것이라고 하여도 자살이 아닌 경우도 많이 있지요.
곧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살려내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우리 현대사 속에서는 훈련 중에 잘 못
던져진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으며 산화한 강재구 소령이나 저 높은 하늘에서 부하동료의 낙하산을
펴주고 자신은 차가운 한강의 얼음 위에 내팽개쳐짐으로 역시 산화한 이원등 상사 같은 이들을 이름들이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놓은 것이며 곧 산화(散華)한 것이지요..
그 분들의 경우는 물론 자살이 아니고 고귀한 희생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이 살았고 그래서
후대에 길이길이 귀감으로 기려지는 이름들로서 남겨지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가족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되었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나 성경에 예수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그렇듯 누군가를 살려 놓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고 죽음에 이른 사람이 주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인데 그것을 그렇게 해낸 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살이’라고 하면 지상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 그 삶 중에 당면하게 되는 모든 일들 곧 호흡으로부터 수고
땀 관계 의심 분노 이해.. 그리고 다툼과 싸움 등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인데 그래서 ‘세상살이가 어렵다’라고
하는 이들은 많아도 ‘쉽다’고 하는 사람은 재물 명예 권세 등의 유무에 상관없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세상살이’는 어렵고 힘들고 고단하고 미워하고 의심하고 싸우는 일의 연속이 되는 것인데 물론 그러한 중에 기쁘고
즐겁고 평화롭고 행복한 일들과 시간들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고단함의 이어짐처럼 계속되지는
아니하는 순간순간 속에 잠시 피어지는 꽃 모양들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쯧, 지금도 적지 않은 이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을 택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하여도 청소년 아이들부터
시작하여 청년 장년 노년들의 자살인구가 년 중 2천 명을 넘어서고 있다는 통계보고를 접하다 보면 참으로
마음의 고단함에서 비롯되는 ‘깊은 한숨’을 길게 내어쉬게 됩니다. 가뜩이나 ‘아이 낳기를 꺼려하고 거부하는’
세태의 진행 속에서 자꾸만 늘어만 간다는 자살율의 확장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지 세상의 핍박을 이겨내는 승리자들이 됩시다.”
라고 애써 힘주어 말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사자들이야 당연하고 의롭다 여겨지는 당위를 가지고
그렇듯 삶의 단절 모양을 택하였든지 간에 자살이란 한 마디로 ‘세상풍조를 이겨내지 못한’ 모습이며
그러한 시선 속에서는 패배자이고 실패자의 모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단은 용자의 모습으로 과감하였지만
결론은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이 되었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하나 뿐인 소중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신만의 대의를 위하여 혹은 괴롭고 고단한 현실도피의 도구 또는
제물로 내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턱을 괴고 돌아보면 이 세상을 맞상대 할 때에
‘혈혈단신(孑孑單身)’의 모양은 있을지언정 ‘나 혼자’라는 형편은 사실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제가 목사인지라 기독교적 관점에서로만 보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어떤 또 다른 관점에서이든 혹은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한 사람에게 ‘생명’보다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기에
그 지킴과 보전의 모양은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생명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 수도 있고
예기치 않은 사고 속에서 스러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다른 생명을 구하는 것처럼 의로운 일도 아닌 것에
그렇듯 자살의 모양으로 내던진다고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상기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러한 것으로서의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수천 년 우리 보다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우리와 똑 같이 대기로 호흡하며 살았던 지혜의 사람이 남긴 말이 아직도 여전한
소중함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고 이렇듯 깊은 심호흡으로 새겨보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19124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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