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장작과 연탄 그리고 라면...

덕 산 2017. 1. 4. 14:04

 

 

 

 

 

 

 

제가 어릴 적- 정확히는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1950년대 후반 즈음- 그것도 끝말 즈음에

저희 집은 그때 막 이사를 들어간 서울 변두리 곧 왕십리 꽃재 언덕에 서있던 초가집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앵두나무가 있었으며 부엌에는 커다란 무쇠 솥이 앉아있고

나무 장작을 넣어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습니다. 또 어린 제가 볼 때에 그때는 이라고 불렀던

제법 큰 창고(?) 같은 다용도실도 있었고 그 광의 땅바닥에서 개미 수천마리가 떼를 지어

모여 있던 것이 생각나는데 어머니는 개미들이 이사를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무쇠 솥 아궁이 앞에 앉아서 이런 저런 잡목 가지들을 뚝-- 분질러 넣으면서

불을 때곤 하셨는데 어떤 때는 저도 가끔 불이 꺼지나 안 꺼지나-’ 잘 감시(!)하라는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그 아궁이 앞에 앉아서는 빠지직-빠지직- 솔가지 같은 나무들이 타는 모습을 빨려

들어가듯 넋 놓고 바라보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당번을 한 날을 꼭 콧구멍 근처가

시커멓게 되곤 했는데 아마도 장작불검댕이 때문일 것입니다. “~~~”고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귀에 삼삼하기도 했지만 허가 된 불 당번이기에 불장난도 겸할 수가 있어서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2년 쯤 후이던가... 초가집을 허무는 유행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동네 초가집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허물기 시작했고 저희 집도 허물었습니다. 시커멓게 썩은 짚단들이 마당에 내려지니 거기에서 굼벵이들이

꾸물럭-꾸물럭- 기어 나왔는데 어른들은 불을 지른 커다란 양철통 위에 석쇠를 놓고 그 자리에서

구워 먹기도 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잡아 깡통에 넣어서는 한의원 집에 가져다주었는데 2~3 마리당

1원 정도를 셈하여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개월이었는지 1년 정도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 초가집을 허문 자리에 기와집이 들어섰고

거기에 입주하여 20년 이상 살게 됩니다. 부엌의 찬장이며 부뚜막 등의 위치나 모양 등은 여전히 비슷한 구조였지만

장작 때는 아궁이는 없어지고 그 대신 연탄 때는-’ 아궁이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쯤 연탄배달의 풍속도가 생겨났지요.

언덕길 좁은 길이었던 때문에 당시에는 주로 리어카와 지게를 이용하여 연탄을 옮기고 들여 놓았습니다.

포장도 되지 않은 뻘건 흙 언덕길을 끙-- 올라가는 연탄리어카를 언제나 쉽게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그 뒤에 붙어서 밀어주곤 하였습니다.

 

 

 

 

 

 

 

언덕 중간쯤에 멈춰 서서 우리들을 보고 씩- 웃으면서 수건으로 땀을 닦던 런닝구(!) 차림의 아저씨...

수건도 런닝구도 이미 연탄재와 땀으로 범벅이 된 검은 얼룩이었지만 웃을 때 드러나는 이빨만큼은

유난히 크고 하얗던 모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렇게 올려온 연탄을 비 안 들이치는 마당 한편과 부엌 한 쪽에 쌓아놓고 한 장씩 덧 올려 때면서

그 위에서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했으며 조리 불로 사용하지 않을 적에는 동그란 속뚜껑

열전달을 위해서 한 쪽이 넓게 열려 벌어진 두꺼비집을 덮어 놓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 즈음에

학교에서 배급 받아온 우윳가루덩어리를 그 연탄불 두꺼비집 위에 얹어 놓고 구워 먹기도 하고

또 국자에다가 물과 함께 넣고서는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가며 끓여 먹기도 했지요. 어떤 아이들은

더 맛있게 먹으려고 아지노모도를 톡톡 털어 넣었다고 하기에 저 역시 시도해 보다가 엄마한테

혼나고는 그만 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즈음에 삼양라면이 본격 출시되어 급속한 속도로 퍼져나갔는데- 어느 날인가 엄마는 한 봉에 아직

10원이 안 되었던 것 같은 즈음에 그 라면을 사와서- 노랑 냄비에 넣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스프를 넣고

다시 더 조금... 그리고는 파를 얇게 송송 썰어서 넣어 다시 한 번 끓이고서는 , 먹어라.” 양은으로 만든

접이식 개다리 밥상에 김치와 함께 얹어 주셨지요. ---!! 그 맛있음이란---!!

 

, 이거 뭐가 좀 이상하다.”

 

어쩐지 내가 직접 라면을 끓여보고 싶었던 터라- 엄마가 없을 때에 형에게 정성을 다해 라면을 끓여 바쳤는데

그것을 먹어 본 형이 한 썰렁한 말입니다. 왜 그러지 이상하네, 왜 이렇게 싱겁지? 간장도 넣고 소금도 넣으면서

간을 맞추다보니 그제야 생각하는 것- 아뿔사, 스프를 넣지 않았네-!! 허허. “어이그-”하는 형의 면박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대신에 잊지 못할 추억도 생겨서 이렇게 반세기가 흐른 후에도 생각하며

허허 웃게 되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었지요.

 

 

 

 

 

 

 

괴로운 것은 연탄불을 갈아 넣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외출하며 단단히 주의하여 일러준 시간

연탄불을 갈아 넣다가 휘-- 하는 어지러움이 갑자기 와서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 동안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일어났던 적도 있습니다. 또 당시에는 연탄까스 중독사고가 많이 일어났는데 저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밤 중에 스며들은 연탄까스로 인하여서 네 식구 모두가 휘청거리며 일어나서는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고

동치미 국물을 퍼 다가 한 그릇씩 마시는 둥- 한 밤 중에 난리법석을 피운 적도 있습니다.

 

번개탄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연탄불이 한 번 꺼지면 쭉-- 찢은 신문지와 잘게 쪼갠 나무들을 연탄 화덕 사이에

넣어놓고 부채질도 하고 풍구를 열심히 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때는 꼭 위쪽의 연탄을 들어내고 밑에 있던 연탄재를 꺼내야 했던 시절인지라 그 과정에서

말썽도 사고도 많이 났지요. 하지만 또 그렇게 꺼낸 따끈따끈하고 뽀얀-’ 연탄재를 언덕길에 놓아두고

조금 식힌 뒤에 발로 냅다 걷어차서 붕- 떼굴- 떼굴- 굴러 내려가던 모양을 보고 깔깔 거리며 좋아했던

 장면들도 떠오릅니다. - 내 손에 장난감이라고는 검정고무신 두 짝이 전부였었던 때였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연탄불 위에 꽁치 세 마리를 가두어 놓은 석쇠를 놓고 툭-- 소금을 뿌려가며 앞으로 뒤로 돌려가며

구우시면서 그 모양을 침을 삼키고 바라보던 우리 삼남매를 보시며 웃으시던- 어머니 아닌 엄마의

얼굴이 한없이 그리워집니다... 세월은 그렇게 가고... 지금도 장작과 연탄과 라면은 여전히 곁에 있어서

만져도 보고 먹어 볼 수도 있지만...

벌써 오래 전 훌쩍 떠나가신 엄마의 젖은 손...

꽁치 굽던 그 손만큼은 이제는 다시 만져 볼 수가 없구나...

 

산골어부 김홍우 2016-12-3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여기까지인가.  (0) 2017.01.17
너희들도 나이들어 봐라  (0) 2017.01.16
문전작라  (0) 2016.12.28
백척간두에 서다.  (0) 2016.12.27
행복한 노부부  (0) 2016.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