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Ⅲ / 최재영
하루사이 계절이 바뀌고 폭설이 지난다
맹렬히 쏟아지는 눈발을
꼼짝 않고 바라보는 짐승이 있어
나는 그를 연민이라 부른다
눈보라 속을 떠도는 맹수의 허기로 길을 내었는지
얼어붙은 족적마다 사나운 울음이 박혀있다
낯선 땅에 서 있어도
맹수의 모습은 낯설지 않은데,
내가 나를 기억하는 지독한 형벌을 바라보다가
나는 더 이상 늙어질 수도 없음을 안다
그와 나의 간극으로 수백 년이 지나고
저물 무렵의 적막이 숨 가쁘다
생애 몇 번의 폭설을 더 지나야
내밀한 마음결이 만져지겠는가
이미 오래 전에 나를 살다간 야윈 짐승
여전히 눈 내리는 행간을 서성이며
이 평생의 저녁을 느리게 건너갈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좁혀지지 않는 시공 가득
지치고 젖은 울음만이 오고가고
그의 등 뒤로 또 한 세상이 기울고 있다
후생까지 이어지는 아득한 폭설
누군가 나를 탁본했는지 천지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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