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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 갈대밭을 지나며 / 조태일

덕 산 2024. 12. 11. 07:13

 

 

 

 

 

야밤, 갈대밭을 지나며 / 조태일

 

달빛이 눈가루로 쏟아지는 밤길이다.

야간강의를 마치고 공동묘지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귀신도 숨죽여 자는 밤,

속살을 드러내놓고

하늘에 저녁내 제 몸을 맡기는

갈대들 속에서 갈대에 기대어

나는 옷을 벗는다.

신열이 나고, 가파른 숨결을 달래기 위해

마음의 누더기까지 벗는다.

 

살도 피도 뼈도 다 바치기 위해

이승 땅 저승 땅 가리지 않고

갈대밭을 지나며 맨살로 지나며

마음과 몸까지를 모두 벗어두고

일찍 맺힌 이슬방울 굴리며

아무것도 없는 채로

갈대밭을 지난다

사각사각 귀신들을 깨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