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 갈대밭을 지나며 / 조태일
달빛이 눈가루로 쏟아지는 밤길이다.
야간강의를 마치고 공동묘지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귀신도 숨죽여 자는 밤,
속살을 드러내놓고
하늘에 저녁내 제 몸을 맡기는
갈대들 속에서 갈대에 기대어
나는 옷을 벗는다.
신열이 나고, 가파른 숨결을 달래기 위해
마음의 누더기까지 벗는다.
살도 피도 뼈도 다 바치기 위해
이승 땅 저승 땅 가리지 않고
갈대밭을 지나며 맨살로 지나며
마음과 몸까지를 모두 벗어두고
일찍 맺힌 이슬방울 굴리며
아무것도 없는 채로
갈대밭을 지난다
사각사각 귀신들을 깨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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