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더뎌가도 정법대로 가게 하소서 / 법상스님

덕 산 2022. 7. 1. 11:30

 

 

 

 

 

더뎌가도 정법대로 가게 하소서

 

말법시대라고들 그럽니다.

그만큼 살기 힘든 시대라고 이야기 합니다.

말법시대 중생들은 근기가 하열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그럽니다.

정법을 이야기해도 자꾸 삿된 법 쪽으로 마음이 간다고 합니다.

 

마음법이며 자성불에 대한 그 어떤 수많은 설법보다는

한낱 밖으로 치닫는,

신비주의적인 외부의 힘에 의지하는

그런 가르침이 더욱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정법 정법을 외치고 수십년 마음을 닦아도

사법(邪法)에 물드는 것은 순간입니다.

'십년 염불 도로아미타불'이라더니 말 그대로 인가 봅니다.

 

사회가 힘겨워지고 나라가 어려워지니

사람들의 삶도 그만큼 어두운 무게가 더해갑니다.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도 이 어두운 삶 막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외소한 우리내 중생의 마음만 더없이 나약해집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그런 충동이 더해갑니다.

 

이럴 때일수록 사법 또한 판을 치게 마련입니다.

한 번 이런 사법에 빠지면 그 어떤 금강같은 수행자라도

쉽게 흔들리게 마련인 것이 우리내 중생들 나약함이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열심히 불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도

어느날 어떤 기인이 나타나

'당신 오래 못 살 것 같아. 단명(短命)의 업보야.'라고 하며

집안 일이며 남편 사업 안 되는 일 등

가족의 온갖 일들을 꼭 찝어 맞춘다면 누가 홀깃 안 하겠습니까.

더구나 당장에 죽을 것이라는데 시키면 무엇인들 안 하겠습니까.

기도비로 수억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빌려서라도 내지 않겠습니까.

 

 

 

 

 

 

요즘 들어 많은 이들이

삿된 가르침에 홀깃하여 굿을 하고 이상한 기도를 하고

무슨 무슨 천도를 한다고 하는 등

기도비로 몇 백에서 몇 천, 몇 억까지 날리는 등

수많은 일들이 우리 아주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조상신이 씌여 사업이 망하는 것이라며

많은 천도비를 요구하고는

불교에서 말하는 천도는 부처의 힘으로

강제로 영가를 내쫓는 것이기 때문에 삿된 것이라 하고

자신이 일대일로 해야만 올바로 천도가 된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귀에 붙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입니다.

우습다고 말하겠지만 말이야 가져다 붙이면 그만입니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말들에 실제 많은 이들은 혹하여 넘어가고 맙니다.

무엇이 정말 바른 것인지 중심이 잡혀있지 않으니

이리로 저리로 바람부는대로 휩쓸리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내 마음 가운데 정법으로써 견고한 뿌리를 세워두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라도 그럴듯한 사법에 이끌리기 쉽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점(占)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전생을 보고...

왜 그렇게 자기뿌리를 믿지못하고 안절부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릿 속으로는 아니야 아니야 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넘어갈 때 보면 순간입니다.

그러고는 뭔가에 씌였었나 보라고 말합니다.

뭔가에 씌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사실 이토록 간사하고 나약한 줄 알아야 합니다.

 

 

 

 

 

 

점을 본다는 것은

이미 점이라는 데에 내 마음의 중심을 잃고

점에 노예가 되겠다는 강력한 자기암시인 것입니다.

점을 보는 그 마음은 너무도 나약한 마음이기에

점괘에 쉽게 마음이 놀아나 그에 노예가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전혀 그렇지 않을 인연인데

점에서 사업이 망할 것 같다고, 혹은 궁합이 맞지 않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점괘에 마음이 머물게 되고

그렇게 되면 마음이 머뭄에 따라 점괘가 실재 현실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마음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지 점괘가 현실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점을 본다는 것은 이미

나는 나약하니 점에 노예가 되겠습니다 하는 나약함의 표현입니다.

점을 믿게 되면 그 믿음에 의해 점이 현실이 되고

우린 그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약한 마음입니까.

 

전생을 본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본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전생을 보게되면 전생에 노예가 될 것이고,

미래를 보게되면 미래에 노예가 될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것은 더 이상 실재가 아니기에 그 어떤 도움을 주지 못하며,

오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에

섯부른 예측은 현실을 그르칠 확률만을 높일 뿐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라는 현실일 뿐입니다.

 

전생을 알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전생에 왕이었으면 어쩌고 거지였으면 어쩔 것입니까.

지금 당장에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 아니던가요.

중요한 것은 전생 그 자체가 아니라

전생의 업식이 내게 가져다 준 현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 그대로의 이 모습이란 말입니다.

 

 

 

 

 

 

 

지금의 이 모습이 바로 전생의 결과이니

전생보다 더 중요한 전생의 결과인 현실을 알았는데

더 이상 전생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생 운운하는 것들은 삿된 분별심 만을 낳을 뿐입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신구의로 행하고 있는 이 모습 그대로가

바로 미래의 예측인 것입니다.

 

미래에만 마음이 머물러 있어 현실을 그르치게 되면

미래는 이미 밝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인이 지금의 직장이 못 마땅하여

몇 년 후에 있을 다른 사업을 구상하느라

지금의 직장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차후에 있을 사업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고

조금만 명상해 보면 우리의 미래는 명확히 그려질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크면 나에게 어떻게 해줄까를 궁금해 한다면

지금 내가 부모님께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면

답은 자연스러워짐과 같습니다.

 

점이며 전생이며 미래라고 하는 것들은

한없이 참 나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고 어리석음을 북돋을 뿐입니다.

 

10년 정진은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찰나 속에 있습니다.

수행자는 늘

'더뎌가도 정법대로만 갈 수 있도록 하소서'하고 발원해야 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당당한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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