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험을 피하려는 풀
김홍우 2020-09-23 11:19:41
풀과 나무들도 자신들에게 가하여지는 위험과 위협에 대응을 한다더니 정말 그러한 것일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저녁 늦게 어스름해질 때까지 예초를 하였던 곳을 돌아보는데 그러는 중에 발견한 것이 분명히 예초를 한 어떤 자리에 풀들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을 보며 ‘이상하다 분명히 예초기로 다 깎아낸 자리인데..’ 하면서 만져보게 됩니다. 내가 이곳을 빼놓고 예초를 한 것인가.. 위치상으로 보아도 결코 그럴 리가 없는 자리인데.. 그래서 어떤 분이 인터넷 상에서 글로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풀들도 다 자기 살 길 찾아요. 저만큼에서 예초기가 다가오기 시작하면 미리 납작 누워버리는 것으로 잘려지는 것을
모면하는 풀들도 있답니다.”
허허 물론 심각하게 학(學)적으로 쓰신 것은 아니지만 혹 정말 그러하고 그러한 결과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저 여느 풀과 다를 것이 없는 잡풀들의 모양들인데.. 하긴 끈끈이주걱 같이 파리 같은 곤충들을 유인하여 잡아먹는 풀꽃들도 있고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동물들에게 독을 뿜어 공격하여 쫓아내는 풀들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1960년대 초중반 즈음에 을지로 6가에 있던 계림극장에서 ‘지옥의 대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누구라도 들어서면 커다란 꽃잎을 오그려서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도 나오지 않던가.. 허허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하였었는데..
주변에 눈치를 보면서 동작과 움직임으로 자기 몸을 사리고 보호하는 꽃이나 풀이 있다는 것은 매우 신기하기도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풀들이 자의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비록 풀들이 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마치 무생물을 대하듯
하지요. 그래서 깔고 앉거나 잡아 뜯거나 베어버리거나 하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표출하지 않지요. 다른 동물들처럼
아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화를 낸다거나 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다가오는 예초기의 날을 피하려고 어떻게든 자세를 낮추려고 하는 풀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알게 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이들은 지금처럼 마음 놓고 또는 신경 쓰지 않고 휘휘 예초를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일까요.. 혹 위험과 위협을 피하려는 풀이 있는지는 몰라도 사람의 눈앞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직접 보여
주는 풀들은 없다는 것 말이지요.

하긴 벌써 이십년도 넘은 전에 어떤 잡지에서 본 것입니다만 한 ‘식물연구진’이 식물들의 자기반응을 연구하는 중에
한 나무에다가 각종 진단 기구를 장착하여 놓고는 사람으로 하여금 커다란 도끼를 들고 “이 나무를 베어버려야지.”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다가가게 하자 놀랍게도 그 나무의 긴장도를 재는 장비의 측정지수가 갑자기 오르면서 나무의 진동치수도 평소의 30배 이상 뛰어 오르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는 발표도 있었지요. 그 나무가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도끼를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부르르 떠는 나무라.. 비록 그 나무들이 사람처럼 생각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단순 반응을 하는 것이라고만 하여도 우리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여줍니다. 그래서 이겠지요. 예전 어르신들 중에는 아이들이 꽃을 함부로 꺾거나 나뭇가지를 부러트리거나 하면 “아서라,
꽃이 얼마나 아프겠냐..” 또 “나무도 고통에 괴로워한단다.”라는 주의의 말씀들을 하시곤 하셨는데.. 요즘에는 식물들을 향한 그러한 배려의 말들은 들어보기 힘들고.. 쯧, 다 당장 자기 살기에만도 힘들고 어려워서 그러기는 하겠지만...
우리 눈에는 움직임이 없는 풀 한 포기에도 귀한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그래서 귀하게 여긴다면 함부로 하는 마구잡이식 풀이나 나무 꽃이나 곡식나락 또는 과실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 이유’에 대하여서도 깊은 호흡으로 생각해보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그 모두가 제 각각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 중에는 ‘나의 함부로 대함’에 부합하기 위하여서 거기에 그렇게 있는 생명들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깎아내고 베어버려야 할 풀들이 있고 가지치기를 하여야 할 것들과 꼭 베어내어야 하는 나무들이 있으며 파리 모기처럼 마땅히 다 때려잡아야 할 ‘생명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당위도 없이 그렇게 있는 것들은 없고.. 그 이유들을 심도 있게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결코 헛일이거나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자리를 펴고 시간을 내어보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눈앞에 보이는 또 보여 지는 현상들을 통하여서 작은 ‘생명의 움직임들’을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며 ‘선한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초 후에도 여전히 살아나서 다시 일어나 있는 풀들을 바라보며 깨닫게 된 것은 이것입니다. 비록 지금 다시
예초기를 들고 그곳으로 나설 것이지만...
- 산골어부 2020923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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