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재건대원 넝마주이

덕 산 2020. 9. 19. 11:24

 

 

 

 

 

재건대원 넝마주이

 

김홍우 2020-09-17 16:06:35

 

사전에서 ‘넝마’란 ‘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옷가지 따위를 일컫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 어릴 적 1960~70년대에 ‘넝마주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들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기에 ‘넝마꾼’이

맞는 말이라고 합니다만 당시에는 거의 누구나 다 넝마주이라고 하였고 저도 그 호칭이 입에 배어 여기서도

그냥 넝마주이라고 하겠습니다.) 넝마를 ‘줍는 사람’이기에 ‘줍는 이’가 되었고 그것이 ‘줍이’에서 ‘주이’로 줄여져서 ‘넝마주이’가 되었을 것이겠습니다만 사실 정부에서 붙여준 그들의 정식이름은 ‘재건대원’이었지요 듣기에는 한적한 변두리 한 곳에 합숙소를 마련하여 주었고 등에는 사람 서너 명은 족히 들어갈 커다란 둥근 대나무 소쿠리를 짊어지게 하고 손에는 집게를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나이였던 넝마주이들은 거리로 나아가서 그야말로 넝마 곧 버려진 물건들을 집게로 집어 휙휙 등에 멘 소쿠리에다가 던져 넣었고 ‘무리한’ 경우들도 종종 있어서 당시 주부 아주머니들의 볼멘소리들이 있었는데 바로 ‘넝마주이들이 널어놓은 빨래를 다 걷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넝마주이들이 들어왔다.’ 라는 소리만 들리면 얼른 밖에 널어놓았거나 담장에 걸쳐놓았던 ‘빨래’들을 거두어

들이고 문단속도 하였습니다. 쯧, 없어서 가난했던 시절의 씁쓸하였던 풍경들이었고 그때의 그 넝마주이를

하였던 분들 중에도 지금은 60대 후반이나 70대 정도가 되어 살아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기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당시에 또 실제로 몇몇 그러한 이들도 있어서 당시 서울 변두리에는 집 앞에 조그마한 두어 평 텃밭이 있었던 곳이 많았고 거기에 외나무를 세우고 줄을 걸쳐서는 빨래를 널어놓는 동네 엄마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그 아래서 어린 저희들이 친구들과 둘러앉아 구슬 따먹기 ‘으찌 니 쌈’을 하고 있는데 웬 넝마주이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 널려진 빨래들 중에서 몇 가지를 집게로 휙휙 집어 소쿠리에 넣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가버리는 것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각각 멍하니 쳐다보았기는 했습니다만 또한 ‘우리집 빨래’도 아니었던지라 그저 크게 나서서 상관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들이었지요. 그 당시 아이들이 더 이기주의였던 것일까요.. 요즘에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들 “넝마주이들이 빨래를 거둬간다”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또 그 다음서 부터는 ‘넝마주이 아저씨’들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생겨졌는데 그렇게 더 하여 준 말들 속에는

“넝마주이가 어떤 집 아이를 소쿠리에 넣어 갔다더라.” 하는 말이 살에 살이 붙여지면서 큰 소문으로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데리고 가서 자식 없는 부잣집에 팔아먹었다더라, 넝마주이를 만들었다더라, 심지어는 잡아먹었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있었는데 물론 이는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 관리 차원에서 경각심을 주려고 만들어 낸 말들로서

사실이 아니었겠지만 그 사실여부를 떠난 당시 우리 같은 10살 남짓한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공포감을 일으켰고 당시 7살 남짓하였던 저의 여동생은 멀리서라도 넝마주이가 보이기만 하면 “망태아저씨 온다!!”고 하면서 놀란

모양으로 집으로 뛰어 들어 가곤 했던 것이 근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파지, 헌책, 고철, 빈병, 신문지.. 그야말로 연탄재만 빼고 다 주워가던 넝마주이들이었었는데 바깥 나무걸상에

어른들이 보고 놔두었던 신문을 주워가서 그 이틀 동안에는 멀쩡한 공책을 두어 장씩 찢어서 변소에가 볼일을

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일에는 주로 신문지를 애용하던 시절이었던지라.. 우리 동네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서는 지푸라기를 이용하는 것을 본 적도 있으니 제가 오래 산 것입니까.. 살기가 좋아진 것입니까..

두 가지 다이기는 하겠지만.. 제가 이제 66살 밖에 안 되어서..

 

 

그런데 참 희한하지요.. 당시에 모두가 가난에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였기는 하지만.. 아이의 심정이었기에 과자라도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날개를 폈던 것일까요.. 그렇게 ‘넝마주이 소쿠리’에 담겨졌다가 ‘자식 없는

부잣집으로’ 팔려간 아이는 이제는 ‘부잣집 아이’가 된 것이니 맛있는 과자도 실컷 먹겠구나.. 하는 생각도 마음의 한 편을 지나갔으니 물론 그렇게 팔려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한 막연한 잠깐의 생각 그 자체로만도 과연 ‘어린아이’였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긴 그때는 어린아이 ‘유괴’사건들도 많았고 1962년 발생한 ‘두형이 유괴사건’은 대통령까지 나서서 담화문을 내었을 정도였지만 지금까지도 어떻게 된 것인지를 몰라 영구미제사건이 되었지요.. 나보다 3살 아래이니까 지금 살아있다면 63살.. 혹 살아있더라도 자기가 그

사건의 당사자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겠지만..

 

 

글의 전개가 서툴러서 잠시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만 지금부터 반세기도 더 전에 넝마주이들이 주으려 다녔던 ‘넝마’들은 과연 지금 같으면 무엇에 해당되는 것일까.. 아직도 버려진 빈 종이박스를 수거하러 다니는 어르신들도 있는데 그 옛날의 ‘넝마주이’에 해당하는 것일까..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주워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부러 가져가기 편한 곳에 내어놓는 이들도 많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무엇 하나라도 잃을까 단속하기에 바빴고..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때는 인심이 좋았다’라고 하는 말들에도 토를 달게 되지만 쯧, 그 모두가 가난이 만들어낸 모양인 것을 어찌하랴.. 라고 하기 에는 또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일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든 글이든 길게 하는 것은 어느 때이든 환영받지 못하는 것인지라.. 그 뒷담들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며

이만 글을 줄입니다.

 

- 산골어부 2020917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