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꼭 잊어야 할 절대로 못 잊을 일

덕 산 2020. 8. 14. 14:35

 

 

 

 

 

꼭 잊어야 할 절대로 못 잊을 일

 

김홍우(khw***) 2020-08-10 23:38:19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절대로 잊지 못할 것’으로서 좋은 일 아름다웠던 일들을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또한 의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을 그래서 억울함이나 원망의 이름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사무침의 모양으로 새겨놓고 피 맺힌 모양으로 잊지 못해하는 경우

들도 많이 있는데 오히려 좋은 일 보다 훨씬 더 많이 있는 것으로 파악됨에 놀라게 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고래로부터 특히 한(恨)을 품고 사는 이야기들이 많고 저주와 복수의 마음을 원통함으로

품고 품었던 일의 이야기들이 그래서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곧 나에게 ‘해코지’를 한 사람들의 이름들이며 얼굴들입니다. 그렇듯 그 선명하게 떠올리면서 이를 갈기도 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모양이 되기도 하지요. 휴.. 그러한 마음들도 한 20~30년이 지나면 다 가라앉게 되면서 긴 한숨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들 역시

많기는 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을 분노의 모양으로 함께 가게 되는 것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로 대변되는 원한 품은 귀신들의 복수전 그리고 옛날 무협소설이나 영화 속에 얼마든지

단골 메뉴로 나오던 부모의 복수, 스승의 복수 형제의 복수 같은 이야기 들은 언제나 봇물을 이루지요.

뭐 옛날이든 현재이든 이러한 복수 류의 앙금은 그렇듯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듯 피맺힘의 당위는 있지만 또한 득이 될 것은 양쪽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주로 ‘칼싸움’시대의 옛날 모습의 풍속도들 속에 일들은 지금 지금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살아가는 속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들은 그러한 법치의 공공질서 아래 ‘사사로운 개인적 원한에 의한 복수의 한풀이’ 같은 모양은 용납되지 아니하는 작금의 날들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기는 한데

또 하긴 칼싸움이 ‘총싸움’으로 변한 시대라고 그러한 ‘복수’의 마음을 한(恨)으로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표면적으로만 많이 가라앉은 모양인 것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 장담 할 수는 없지요.

 

 

이렇게 ‘아주 없다’가 아니라 ‘있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 이유는 그래요 아직도 있기도 하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아닌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현재를 사는 사람의 사는 모습은 외견상으로는 생활과학을 비롯한 각종 문명의 발전 등으로 놀라운 변화를 하였지만 그 심성의 모양들은 몇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도 사랑하고 미워했으며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고 적어도 이

방면으로는 내일 곧 미래에도 같을 것이 확실합니다.

 

 

쯧, 기쁘고 즐거우며 아름다운 사랑만 하며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미움 시기 다툼 원망..의 모양들이 마구 뒤섞여진 것으로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얼굴이 있고 생각

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이름이 있고 어쩌다 떠오르기만 해도 칵칵 침을 뱉는 것으로 마치 재수 없는

것이나 자리에 소금을 뿌려 액땜을 하는 모양처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러한 원망과 미움의 이름들과 얼굴들은 그렇게 할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생각나고 떠오른다고 경험자들과 간증하는 이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지요. 그래서 아주 잊어버리고는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러한 ‘한 맺힌 영상’을 결과적으로는 일부러 애써 끌어안는 모양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 ‘절대로’ 잊지 못할 일이나 이름이나 얼굴이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부디 좋은 일 기쁘고 감사한 일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또 혹 그렇지 못하여 이글이글 미움의 화염 속에 무럭무럭 피어나는 얼굴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지금부터라도 ‘잊는 연습, 지우는 훈련’에 돌입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인생을 깎아 먹고 내 행복의 강물을 풍덩풍덩 온통 흙탕물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흙탕물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까 대충 가늠하여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 저기 부딪히고 헛딛고 걸려 넘어지고 하게

되지요. 옳게 곧게 나아가는 정진은 없고 날마다의 ‘허우적거림’으로서의 발버둥과 몸부림이 늘 나의

일상모습이 되어 버리고야 맙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지나가 버린 금쪽같은 내 인생의 시간들은 어디 누구에게서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듯 앞이 어두워 찾지 못했던 내 앞의 ‘기회’들은 다 어쩌란 말입니까.. 이러한 말들이 큰 과장을 하여가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를 한다면 원망의 얼굴과 미움의 이름에 대한 분노를 많이 가라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라앉고 비워진 마음속 한 자리에 ‘사랑의 기쁨’을 담을 수만 있다면 당신과 우리들의

삶의 모양이 분명히 그리고 확실히 달라질 것입니다.

 

 

유명한 이탈리아 가곡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 ‘사랑의

기쁨’의 가사는 ‘사랑의 슬픔’을 노래한 비련의 내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 노래의 선율에만 취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미운 마음 원망의 마음이 들더라도 사랑의 이름과 얼굴로 승화시켜 보세요. 나를 편안하게 하고 우리를 편안하게 하며 결국에는 모두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웃는 말로 해보거니와 그 이름 당사자의 꿈자리 역시 편안해 질 것입니다. 허허. 그리고 비록 마르티니는 아름다운 선율에 아름다운 제목을 붙이면서도 그 속 내용에는 그렇듯 ‘슬픔’을 담아 놓았지만 그 노래의 제목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사랑의 기쁜 감정과 기분’ 속으로 들어가지 ‘슬픔과 괴로움’으로 애써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슬프고 화나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원망의 얼굴과 미움의 이름이 왜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그렇게 평생 가지고 있어 본들 몸과 마음과 생활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잊는 연습, 지우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사랑으로 승화시켜 놓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무너지지 않는 ‘미움의 탑과 원망의 성벽’이 없으며 녹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먼저 그렇게 될 때에 또한 그러한 일들이 이어 일어나게 되는 것이므로 먼저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어떻습니까. 당장 오늘부터 이 시간부터라도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럴까 하면서라도 시험과 실험에 돌입하여

보는 것이 혹이라도 이 일로 발생하는 모든 부정적인 모양의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늘 평안으로

행복하시기를

 

 

- 산골어부 2020810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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