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성과 반대의 세상
김홍우(khw***) 2020-07-29 15:30:27
이미 진행되어졌거나 앞으로 진행되거나 되어 질 일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의 겨룸과 다툼의 만발 모양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거기에서 서로 충돌하여 전쟁도 나고 뺏고 심하게는 죽이는 일까지도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국회에서 여러 가지 입안 사안들과 정책의 심의 발효 여부를 놓고 늘 그랬듯이 여당 야당으로
갈라진 찬성과 반대의 모양들을 보면서 늘 우리들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은 ‘찬반의 모양’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만 보아도 이승만정권에 반대하여 4.19가 났고 윤보선 국민당 정부의 내각책임제 치세의
역부족과 부조리한 모양에 반대하여 5.16이 일어났으며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여 5.18 희생과 비극이 생겨났습니다. 서양이나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일본의 도조 히데키의 동남아 진출야욕과 독일 히틀러의 유럽 정복
야욕에 반대하여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김일성의 적화야욕에 ‘반대’하여 저항한 것이 6.25 전쟁입니다.
물론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각각의 심정적 찬반의 문제만은 아니고 거기에 생활과 생존이 달려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 또한 나의 생활과 생존이 위협을 받거나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의 몸과
마음에 불편을 겪는 것에 대하여 격하게 반대하는 모양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반대의 힘’은 크고 강하지만 ‘찬성의 힘’은 약하고 순한 모양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반대하기 위하여서는 목숨이라도 내놓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찬성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 놓는다’라는 표현은 드문데 그 이유는 어떤 집권 세력의 논지에 찬성을 하게 되면 양쪽 모두가 주먹을
쥐고 싸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와
결집의 모양들은 그 모두가 그 무언가를 ‘반대’하는 것으로 규합하여 힘을 합쳐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지요.
정책이든 시책이든 정부가 주도하는 어떤 사안이나 진행에 대하여 찬성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기는 하지만 그 찬성으로서의 지원시위는 규모에 있어서나 열정과 각오의 모양에 있어서나 반대시위의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는 몇몇 이유를 들 수는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무언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려면 최루탄에 고통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전경들의
몽둥이세례를 피해 갈 수 없으며 체포 구금 구속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과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대시위자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야 할 일이 있고 개처럼 끌려가야 할 일도 생기는
것이기에 쉽게 손을 들고 자원하여 나서기 힘이 듭니다.

또한 그렇듯 반대시위에 나서는 이들 모두가 가정과 가족이 있고 누군가의 자녀들이며 어떤 형태로이든지
사회공동체를 표방하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국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직접 몸으로는 나서지 않지만 물자를 지원한다든가 마음으로 곧 심정적으로만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반대’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 충돌과 법적제재를 각오하지 않으면 나설
수 없으므로 주로 젊은 혈기와 정의수호적 의의에 몰입하면서도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족구성의
모양 속 부담 같은 것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젊은이들이 많이 나서게 되지요.
그러면 왜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물론 사회적 정의, 국가적 대의, 정의 수호적
의로움의 분출이 있지만 가장 앞서는 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이들이 서로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대시위자는 수백 수 천 수 만
명이 되어 지면서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목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데에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로 모이게 되고 거리로 나가게 되면서 온갖 어려움과 고단함 그리고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대의적
견지에서 개의치 않습니다.
지난 인류사 속에서 그래 왔듯이 사람들의 찬반으로서의 모양의 갈림은 앞으로도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나아갈 것이 자명하기에 사람들은 서로의 충돌과 피 흘리는 것을 막고 피하기 위하여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우리 중 다수가 원하면 실천 실행 집행하기로 한다’는 것으로서 ‘다수가 즉 정의’라는 구도를 사회적 합의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지요. 이것은 곧 ‘다수가 원하면 소수는 따라야 한다’라고 하는
것인데 모든 세상의 민주국가들이 표방하고 있는 작금의 보편적 제도인 것이지요. 그래서 대통령도 국민다수의 표를 얻은 사람이 선출되고 국회에서도 다수의원들이 찬성한 사안이 채택되어 공표되고 실행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컬어 ‘선진 국민’이라고 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은
멸시를 당하며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내가 반대를 하여도 다수가 찬성을 한다면 그 진행과 결과에 순응하고 순복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껏 살아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도 가운데서 아직까지는 가장 모든 이들의
호응을 받는 제도라 할 것이며 이 세상 거의 모든 나라들이 그러한 ‘다수결의 원칙’을 가장 마땅한 ‘민주주의 적인 것’으로 받아 들여서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결의 원칙 라고 하면 100면 중에 51명이 찬성하면 다수의결이 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 역시
절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49명의 의사는 그대로 사장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분분하기 때문에 무조건 적인 ‘과반’이 아니라 2/3 이상의 찬성을 그 합법적 다수라고 하여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마는 즉 과반은 넘지만 2/3에는 못 미치는 상황이 계속 될 수 있는 경우의 연속적 발생 때문이라고도 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것을 원칙의 제도로 채택하는 나라도 기관도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만 오직 ‘다수’ 즉 표의 갈림에서 단 한 명이라도 더 보태어 졌다면 그것이 ‘국민다수’와도
같은 뜻으로 통과되는 것인데 휴.. 어떻게 지혜를 좀 더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하여 보지만 이를 가뿐히 넘어서고 상쇄할 묘수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회의, 국무회의, 국회의결 등에서 아주 특별히 예외적일 수 밖에 없는 사안이나 경우가
아니라면 다수의 찬성표를 요구하고 통과시켜 집행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국제적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아
이렇듯 거의 절반씩의 모습으로 갈라진 찬성과 반대의 대립각이 여전한 갈등과 서로의 피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찬성보다는 반대로 뭉치는 힘이 강하여서 반대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는
이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찬성 쪽으로의 그러한 움직임이나 규합의 모습은 매우 드문 일이며 장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반대로서의 규합 모양이 그렇듯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요.. 이것이 정신이나 심리 쪽이나 사회현상으로서의 심화모양에서 다루어지고 연구되어 지는 것은 이 방면에 전문가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다수 대중된 이들이 ‘나는 몰라도 된다’라고 덮어 둘 수만은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불만족 인간론’을 들어서 인간 본연의 ‘불만족 심리가 모든 만족의 표출을 억 누른다’ 고도
하였는데 생각해 볼 일이기도 하지요.
또 그러면 왜 만족은 작고 불만은 큰 것일까.. 그것은 만족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지만 불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만족은 힘이나 세력의
규합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불만은 ‘더 큰 만족’으로 나아가기 위하여서 같은 목적과 목표를 갖는 이들을 더욱 모으고 단합하여 그 관철을 위한 세력을 조직 형성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 사회 속에 단순한 시위의
모양도 만족의 표현보다는 불만의 표현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큰 만족’이란 선량하고 마땅한 것으로
지향할 수 있는 목표이자 목적인 것 같지만 거기 그 속에 뱀의 똬리처럼 웅크리고 있는 ‘욕심’이 지양되지
아니하면 오직 비극으로 치닫는 기초마련의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사람은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조건들에 대하여서 ‘힘쓰고 애써서라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일생을 통하여서 단 한 가지도 단 한 번의 만족도 가져보지도 누려보지도 못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말은 말은 과연 두고두고 새겨 볼 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쓴 이 글은 그러한 작금의 형국에 대하여 어떠한 선명한 대책이나 대안을 들거나 또는 무리한 어떤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한 찬성파와 반대파의 심도 있는 각성의 모양을 촉구하고 채근하는 것이라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반대’를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저 다수에게 쓸려가거나 휘둘리는 것으로서의 반대는 아닌지 혹은 오직 내 개인의 유불일과 취향일편에서 되어 진 것은 아닌지 꼭 그리고 철저히 돌아보면서 자기검증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 끝 날까지 사람들은 어떤 당면 사안에 대하여 반대도 계속되고 찬성도 계속 될 것이지만 과연 공공을 위한 찬성의 모양과 반대의 모양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으로 이어질 때에만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유익을 끼치는 애국애족 시민의 모양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여기까지 글을 썼습니다. 오직 내
마음의 진정한 선(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반대와 찬성 으로 우리 모두의 모습들을 바르게 세우십시다.
- 산골어부 2020729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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