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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읽지 않음 / 허영숙

덕 산 2025. 11. 18. 18:34

 

 

 

 

가을, 읽지 않음 / 허영숙


단풍 보러 가자는 말
몇 번이나 미루고
열흘 후쯤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약속만
너에게 남겼던 것인데
성급한 단풍이 저물까
혼자 단풍버스를 타고
온몸에 단풍을 적셔 돌아오는 길에 너는 그만
그 가을을 베고 모로 누웠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눈으로라도 밟아 보라고 차곡차곡 쌓아 보낸
사진 속 너의 가을을 읽고
내년에는 같이 단풍 보러 가자고 전송한
나의 답은 여전히 읽지 않음,
영원히 읽지 못할 문장으로 박제되었다

미룬 약속의 후회가 슬픔을 후벼파고
바싹 마른 가을 숲이
천근의 눈물에 젖어 그렁그렁 휜다

너를 태운 운구버스 곁으로
여전히 단풍버스는 단풍단풍 달리고
남은 자들의 가을을 밝으며 너는
조문하는 은행나무 노란 잎그늘을 지나
그 가을로 가서는
영원히 귀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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