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화를 치다 / 이영식
노인정 뒤뜰 매화나무
꽃 피우고 열매를 꺼내 보이는 일이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네
할머니 할아버지들
화투 치며 내다보고 장기 두다 건너보며
눈도 털지 않은 매화나무에 눈도장 찍으시네
겨우내 잠자던 꽃망울 불러내어
매화를 치네
꽃이 피었다 진 뒤에도
마음은 종일 나무 그늘을 서성거리네
손자 녀석 불알 쓰다듬듯 매실을 키우시네
노인정 선반 위 유리병 안에서
파릇파릇
봄날의 기억들이 매실주로 익기도 전에
한 노인이 매화나무 뿌리 속으로 기어들어가셨네
아무도 울지 않았네
바람 불고 낙엽 지고 또 눈 내리는 날에도
난초 단풍 뒤집고 바둑 장기를 두었네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았네
새봄, 겨우내 얼려두었던 눈물을 펼치네
잔설이 성성한 화폭 위에
다시 매화를 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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