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매화를 치다 / 이영식

덕 산 2025. 4. 17. 06:09

 

 

 

 

 

매화를 치다 / 이영식

노인정 뒤뜰 매화나무

꽃 피우고 열매를 꺼내 보이는 일이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네

할머니 할아버지들

화투 치며 내다보고 장기 두다 건너보며

눈도 털지 않은 매화나무에 눈도장 찍으시네

겨우내 잠자던 꽃망울 불러내어

매화를 치네

 

꽃이 피었다 진 뒤에도

마음은 종일 나무 그늘을 서성거리네

손자 녀석 불알 쓰다듬듯 매실을 키우시네

노인정 선반 위 유리병 안에서

파릇파릇

봄날의 기억들이 매실주로 익기도 전에

한 노인이 매화나무 뿌리 속으로 기어들어가셨네

아무도 울지 않았네

바람 불고 낙엽 지고 또 눈 내리는 날에도

난초 단풍 뒤집고 바둑 장기를 두었네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았네

 

새봄, 겨우내 얼려두었던 눈물을 펼치네

잔설이 성성한 화폭 위에

다시 매화를 치네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비꽃 / 임준빈  (0) 2025.04.19
사랑과 언약, 신의 / 서문원바오로  (0) 2025.04.18
풍매화 / 하종오  (0) 2025.04.16
동백을 보며 3 / 임현호  (0) 2025.04.15
오! 제비꽃 / 안경애  (0) 202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