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더, 더, 더 의 모양은

덕 산 2020. 7. 27. 08:11

 

 

 

 

 

더, 더, 더 의 모양은

 

김홍우(khw***) 2020-07-25 12:28:57

 

이제 나이가 65살.. 우리나라 현재 풍속에서는 경로(敬老) 대접을 받는 이즈음이 되니까 작금의 생활이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되는군요. 그래야 현재의 보편적인 삶의 나이들로 보아 저 역시도 앞으로 한 20년 정도를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생각을 하여 보는데 혹 그 정도를 더 살게 된다면 지금 이 나이쯤에서 지난날을 돌아보아야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진행과 구성을 좀 더 제대로 갖추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것이고 누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닌 만큼 정직하고 솔직하게 ‘나’를 돌아보게 되는데.. 그래요.. 유익이 되는군요..

 

 

우선 나쁜 짓을 일삼거나 악하게 살아오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쯧, ‘일삼거나’ 하는 대목에서 눈치를 채셨겠지만 ‘밥 먹듯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누구네 집 담을 넘어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거나 한 적은 없지만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연필 등 학용품을 몰래 집어 오거나 찬장 선반에 엄마가 올려놓은 지전을 슬쩍 집어다가 시시덕거리면서 친구들에게 펑펑 과자 해삼 딱지 등으로 인심을 쓴 적이 있으니 이것도 도둑질은 도둑질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날은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는 시간까지도 집밖에서 서성이며 들어가지를 못했고 또 어떤 날에는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어머니나 형에게 ‘뒤지게’ 얻어맞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어릴 적’이라고는 하지만 두고두고 평생을 후회하며 지금까지도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자랑스럽지 못하고

또 ‘어릴 적이니까’라는 변명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그때 그 정도 된 아이들이나 청년들에게 ‘나이 많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조심을 하게 되는 일로서 주의를 거듭하게 되는데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하여도 ‘나쁜 버릇’으로 몸에 배인 것은 자연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행히도 그때를 제외한 지난 시절 반세기 속에서 누구의 것도 ‘훔치지는’ 않고 살았으니 다행이고 그러한

악습이 몸에 배어 ‘여든 살까지’ 나아가는 것은 차단하였다고 생각되니 더욱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주의만큼은 이어 계속하게 됩니다. 그래요.. 10 살쯤 되었을 때에 무엇을 훔쳤던 것은 훗날 이야기꺼리가 될 수도 있지만 60살이 넘어서 누군가의 무엇을 훔쳤다는 것은 그냥 ‘도둑놈’이라는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다가 무덤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로 인하여서 법적 처벌을 받든지 안 받든지 마찬가지인데

곧 ‘내가 내리는 처벌’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도 나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정죄이고 단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혹 그 양심이 없고 또는 없애거나 뭉개며 나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의 기억’ 만큼은 임의로 없애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래서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정죄와 단죄의 대상이 될 만한 일들을 행위로 만들어 가져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랑과 자긍’으로서의 말과 행동의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그 자신의 일생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곧 나 자신에게 내가 부여하는 ‘훈장’이며 ‘칭찬’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중에 얼마든지 이 같은 일들을 만들어 놓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내 마음 속에서 불 같이 일어나는 ‘욕심의 팽배’를 막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더, 더, 더 (more, more, more)를 외치며 더 갖기를 소원하고 염원하며 치닫는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더 가져야 흡족하고 더 있어야 만족하고 더 생겨야 안도하는 모양인데 그 조차도 제한점이나

제한선이라고는 없는 것이니 오직 평생을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때가 되어 스러져 버리는 모습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나도 저 속에 속하여 저래야만 하는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되면서 일단은 그렇게 사회적 법적

정죄를 받고 있는 이들보다는 그 정도가 그저 약간 덜한 저의 모습에 아주 작고 적은 위로를 받으면서 아주

작게 휴.. 안도하기는 합니다만.. 언제까지 일지... 참으로 저를 포함한 사람들의 끝없는 욕심과 욕망에 대한

개탄의 마음과 탄식의 모양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 아니야. 난 안 그래 하지만 ‘지금 안 그렇다’는 것뿐이지 언제 또 그렇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을 못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고 지식과도 관계없으며 손에 쥔 부(富)와도 별개인 것이 분명하니 과연

사람의 욕심과 욕망이란 그 생성의 근저가 무엇인지를 더욱 찾아보게 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정답은 이미 뻔한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내 마음 속에서 더, 더, 더 외치기를 거듭하고

있는 이 목소리가 과연 ‘내 목소리’인지 ‘악마의 목소리’인지 또는 ‘악한 영에게 휘둘리고 있는 나의 절규이자 비명소리’인지를 잘 구분하여 대처하고 막아내야 할 것입니다. 더 갖기를 원하는 것 자체보다는 그렇듯 더

갖기를 원하는 눈으로 남의 것을 넘보게 되는 것이 바로 죄악의 단초가 되어버리곤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더, 더, 더의 반대가 되는 말은 덜, 덜, 덜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참 재미있지요. ‘덜덜덜’이라는

표현은 몸과 마음이 떨리는 모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과연 우리 모두는 ‘더 더 더’에 대하여서 ‘덜 덜 덜’

하는 모습으로 몸과 마음을 떨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나를 지키고 ‘내 영혼’을 지켜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땅, 집, 자동차, 현금.. 그리고 무엇이든 나의 창고에 더, 더, 더 넣어 놓기를 거듭하는 일을 내

스스로 막아내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은 그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하여 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덜’ 갖기를 원하고 거기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평안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은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바로 그 삶을 망쳐 놓으려고 하는 내 귓전에 ‘악한 속삭임’을 일거에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그렇듯 ‘일거(一擧)’에 물리치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결국에는 물리치는 이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시간과 수고와 결단으로서의 물리적 손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물리치지 못하면 우리들의 삶에는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있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만족’ 보다는

‘일생의 행복’을 위하여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것에 대한 더, 더, 더 로서의 마음의 욕심을 물리치는 이들이

그래서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산골어부 2020725 / 출 처 : 조선닷컴 토론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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